덕적도에 마을공동체를 건설한 최분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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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에 마을공동체를 건설한 최분도 신부
  • 김용구(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4.10.17 00: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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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새로운 발견 7

덕적도 서포리 전경

“신부님과 마을사람들이 직접 전주를 매고 산을 넘어 전봇대를 설치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지. 그래서 산속에 있는 열매 중에서 새카맣게 익어야 맛있는데. 신부님은 까만 것이 못 먹는 것인 줄 알고 빨간 걸 먹었는데 너무 쓰고 맛이 없어 놀라면서 이걸 어떻게 먹느냐 하더라고”

최분도 신부 집안과 한국과의 남다른 사연이 있다. 미8군에 복무하던 둘째 형은 서울 명수대성당 건립에 큰 도움을 주었고, 1956년 8월 여름 한강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두 소년을 구출하고 자신의 생명을 버렸다.

그는 1959년 9월 메리놀 외방선교회 사제로 미국에서 무역선을 타고 40일 걸려 부산에 도착한다. 1960년 답동, 송림동, 백령도본당 보좌신부를 역임하고, 1962년 연평도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서해도서 22개 공소를 관할하게 된다.
 

최분도 신부

 “61년에 나는 덕적도 공소 사무장이면서 면사무소에 근무했지. 당시 둥근 아치형 모양으로 성당을 공사 중인데 하루는 아침에 성당에 가보니 키가 작고 얼굴이 하얀 젊은 신부가 있더라고. 그날 최신부님을 처음으로 만났지. 그는 성당을 이렇게 지면 안 된다고.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건축해야 한다고 했지. 그러나 전임신부님이 시작하신 것이니까 그대로 완공하라고 말씀하셨지.

그 이후 나에게 같이 일하자고 말씀하셨어, 그러나 나는 6개월 동안 대답 안했지. 어느 날은 내가 면사무소에 출근해서 보니 신부님이 면장에게 같이 일하게 해달라고 하시더라고. 면장은 당사자끼리 이야기하라고 했지. 그래서 그 이후부터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꼭 30년 동안 신부님을 모셨지“ (서재송)

서해 낙도에 병원선과 병원을 개원하다

1964년 서해낙도에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위해 낡은 미군 함정을 구입하여 병원선으로 개조하여 '바다의 별'로 이름 짓고 환자를 진료하였다. 병원선은 의사1명과 남자 간호사1명 X선 촬영은 물론 간단한 외과수술 시설까지 갖춘 '한국 최초의 수상 병원'이었다.
 

병원선 '바다의 별'

“덕적에서 연평도까지 통화가 가능한 무전기가 있었어. 그걸 켜놓고 급한 환자가 있으면 연평에 연락해서 진료 받고 했지요. 연평에서 덕적도 주변 섬과 심지어 울도까지 갔다 오고했어. 그런대 병원선만 가지고는 수술을 하기가 어렵고, 중환자를 실고 인천까지 후송하기 어려워 1966년 12월 14일에는 덕적 성당 옆에 ‘복자 유베드로 병원’을 개설했지.

병원에는 외과, 내과, 산부인과, X-선과가 있었어. 당시로서는 현대 의료기구와 약품들을 미국이나 서독에서 직접 들여와 국내에서도 가장 최신식 시설이었어요. 의사들은 성모병원에서 파견되어 처음에는 3개월 근무했고, 여기 와서 3개월 에서 6개월 정도 있고 했는데 병원에 오는 의사들이 제일 엘리트였지” (서재송)

병원선 ‘바다의 별’은 덕적도 주변섬인 문갑도?백아도?울도 등을 돌면서 환자를 호송해 오는 업무를 맡았고, ‘복자 유베드로 병원’에서는 입원과 치료를 담당했다. 그간 의료 혜택을 받은 주민 수는 연인원 7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낮은 문턱과 최신 진료 시설로 인해 주변 섬에서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60년대 도서에 전기가 들어오다

“30킬로와트 발전기로 병원과 사제관에서 전기를 사용하다보니 미안하거든. 신부님이 부산에 있는 미군레이더 기지에서 발전기를 구입했지. 새벽에 붕붕 하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배가 와서 떠 있더라고. 내려가 보니까 지금 같으면 포클레인이라도 있지만 그 때는 아무것도 없어 동네 사람들이 다 동원되어 줄을 가지고 당겨보니까 끊어졌어. 선장이 보더니 딱하니까 큰 줄을 내주더라고. 그래서  남은 선은 밑에다 깔고, 배에서 준 팔레트를 밑에 놓고 발전기를 하루 종일 마을로 끌어 올렸지. 그렇게 발전기를 두 개 구해 서포리에 전기가 들어왔어. 그 당시 60년대 중반 정도인데 아마 도시보다 더 빨리 전기가 들어왔지.

전기가 들어오니 너무 신기해하면서 자기네 집도 전기를 달라고 아우성이더라고. 그래서 서울 미아리 근처 전신주를 생산하는 기업에 가면 물어보니 생산비 삼천 원에 운반비 삼천 원 달라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 철근 과 시멘트를 구입해서(모래와 자갈은 여기서 구했음) 사각모양 전신주를 만들었어. 현재도 그때 만든 전신주가 몇 개 남아 있어“ (서재송)
 

당시 만들었다는 사각 전신주

“우선 서포리에서 출발하여 전신주를 매고 산을 넘어서 북리까지 전신주를 놓고 전기를 공급했지. 순차적으로 진리 등 덕적도 마을 전체에 전기를 공급했어. 해 지면 발전기를 돌려서 12시까지 공급하고 중단했다가 새벽 5시 부터 공급했지. 그리고 전기 조합을 만들어 덕적면장이 조합장에 취임했고. 신부님이 면장을 조합장으로 추천해한 이유는 면의 관심사가 돼서 덕적면에서 조합을 계속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거야. 신부님은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뒀고.” (서재송)

1972년 당시의 내무부 자료에 의하면, 덕적도 850호에 592kw를 민영발전을 하고 있었다.

제방을 막아 농경지를 확보하다

 “1962년 가톨릭 구제회 지원을 받아 신부님은 바다의 제방을 막아 논경지로 사용하도록 하셨는데,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밀가루를 지급했어. 밀가루를 그냥 지급하는 것보다 노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공사에 참여토록 했지. 그 당시 밀가루로 막아도 제방이 완성된다고 할 정도로 밀가루가 많았어. 하지만 농지조성을 위한 서포2리 간척 사업은 완성하지는 못했고, 나중에 국가에서 완공했어.” (서재송)

서포2리 대규모 간척사업은 90%를 완성해 놓고 1971년 정부에 이관했다. 이 공사로 27만평의 농토가 확장돼 덕적도 주민 4개월분 식량을 증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비교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간척사업인지 알 수 있다.
 

 
상수도를 설치하고 김 양식을 시작하다

“당시 집집마다 물 길어오는데 한두 시간씩 걸렸어. 겨울에는 큰 고생이었지. 오죽하면 도시에는 물장수가 있었을까. 농한기인 여름에 땅을 파고 파이프 묻고 했지. 마침 서울교구 신학생들이 캠핑할 때였어. 그들이 파이프를 연결하고 운반해주어 많은 도움이 됐어. 상수도는 서포리만 설치했지. 수돗물만 틀면 바로 물이 나와서 무척 편리했어.

또 신부님이 연평 및 덕적 사람을 선발해 포자양식 기술을 배워 김(해태)양식을 시작했지. 서울대학교 해양학과 교수들을 초청해서 김 한 장에 얼마나 영양 가치가 있는지를 분석해 홍보자료로 사용했어. 그런데 그분들이 덕적 해변을 얼마나 돌아 다녔으면 주민들이 간첩 신고를 할 정도였어. 당시 서포리와 소야도에서 김을 많이 생산했지.“ (서재송)
 
1972년 덕적도 김생산 면적과 생산량은 다음과 같다.
 
김(해태) 면적 김(해태) 생산량
덕적도 4.13ha 2000속
소야도 0.64ha 2000속
분갑도 0.8ha -
백아도 1.616ha 1000속
자료: 내무부
 

최분도 신부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을 돕다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똥물 테러를 당하고 공장에서 쫓겨나 갈 때가 없자 신부님이 송현동 성당 2층 건물을 내어 주셨어. 그때 문정현 신부와 조화순 목사가 많이 도와주셨지.

한번은 남민전 사건으로 이재문씨가 체포되고 사형 당하자 부인이 갈 때가 없자, 신부님이 송현동 성당 선교사로 근무하게 하였지. 그런대 송현동 일대에 경찰들이 이 사람은 간첩 부인이다 언젠가는 나타날 거다. 당신들이 목격하고 신고 안하면 당신네들도 걸린다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집집마다  뿌렸어. 그러자 신자들이 나에게 와서 이거 무슨 일이에요?, 여회장이 간첩이래요?, 삐라를 가져오기도 하고 항의를 해서 해명 하느라고 무척 혼났어.

이재문씨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망했는데, 시신을 형이 인계받아 부인이 성당에서 사니까 시신을 송현동 성당으로 모셔왔지. 경찰서에서 나와서 시신은 국사범입니다. 절대 공식적인 행사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들이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하지 않았냐. 가족이 천주교 신자인데 우리는 장례미사를 드리는 것이 교회법이라고 항의하였지. 우여곡절 끝에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장례미사를 했지” (서재송)

마을공동체를 실천하다

이처럼 최분도 신부와 마을주민들은 신뢰와 협력을 통해 약 50년 전에 이미 마을공동체를 실천하였다. 마을공동체란 ‘마을을 지역 범위로 설정하고 성원들이 소속감을 가지며 그 집단 내에서 공동목적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성원들로 구성된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당시 덕적도 마을공동체 구체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마을공동체 유형 덕적도 마을 공동체
협동경제 김 양식, 둑을 막아 농경지 확보
마을재생 상수도 시설, 전기 조합, 하천 복개 공사
생활복지 바다의 별 병원선, 복자 유베드로 병원

또한 전기조합 조합장에 덕적면장을 취임하게 하고, 서포2리 둑을 90%를 완성해 놓고 정부에 이관한 것을 보면 거버넌스(governance, 공공경영) 실행과 마을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몸소 실천했다.

최분도 신부는 1971년 6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고, 그해 청와대를 방문했다. 혹자는 이때 새마을운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제공했다고 한다.

덕적 본당은 자월?이작?승봉?소야도?백아도?울도 등 주변의 많은 공소를 관할했다. 이 때에 덕적도와 인근 섬 주민의 45%가 천주교인이었다. (옹진군지, 1989)

실제 옹진군 통계에서 천주교인 비율(덕적면 인구수를 천주교인 수로 나눈 비율)에 의하면,면 1960년 2%에서 1972년 22%로 20%가 증가했다. 그러나 1976년 최분도 신부는 송현동 성당으로 발령되어 덕적도를 떠나게 되었다.

 

자료:옹진군청

최분도 신부가 덕적도를 떠날 무렵 덕적도 주민들은 신부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 지금도 공덕비는 서포리 해수욕장을 지키고 있다.
 

최분도 신부 공덕비

1980년 덕적성당은 본당을 폐지하고 숭의동 공소로 지정된다. 1982년 신자 수는 6%로 감소한다.


* 최분도 신부 약력

최분도 신부(Father Benedict A. Zweber M.M.)는 미국 미네소타 주의 ‘뉴마켓’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1932년 1월 7일 아버지 노벨 즈웨버(Mr. Novel Zweber)씨와 어머니 에블린 즈웨버(Mrs. Evelyn Zweber) 여사의 10남매(5남5녀)중 다섯째(3남)로 출생했다.

1938. 9 ~ 1946. 8 : 성 니고나오 초등학교 졸업
1946. 9 ~ 1950. 6 : 나사렛고등학교 졸업
1950. 9 ~ 1954. 6 : 성 바오로 신학대학 철학과 졸업
1954. 9 ~ 1959. 6 : 뉴욕 메리놀 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1959. 6. 13.: 사제서품 및 한국 파견 준비
1959. 9.    : 메리놀 외방선교회 사제로 내한 (무역선 이용)
1960.       : 답동, 송림동, 백령도본당 보좌신부
1962. 6.    : 연평도본당 주임신부(서해도서 22개 공소관활)
1966. 4. 13 : 덕적 본당 주임신부(인천교구 17번째 본당신설)
1976. 1. 8  : 송림동 본당 임시보좌 (송현동 본당 신설 준비)
1976. 10. 1 : 송현동 본당 신설 주임신부
1982. 2. 16 : 부평3동 본당 신설 주임신부
1986. 9. 20 : 산곡2동 본당(현 산곡3동) 신설 주임신부
1990. 2. 15 : 미국 메리놀선교회본부, 성소사목 활동
1997.       : 러시아 카브로스키 성당 환원 추진
1998.       : 사할린 한국동포 신자 발굴, 성 야고보 성당건립
2001. 3. 26 : 미국 뉴욕 성녀 테레사 양로원에서 선종

* 사진 제공과 장시간 인터뷰 해주신 서재송 전사목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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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2015-11-18 13:30:19
부평3동 고가다리옆 2층에 세들어 있을때 미국인 친구 마이클 에번슨과 성당내 신부님 집무실에서 밤도 많이 지냈는데 영세도 그분이 우리 삼형제 집무실에 앉혀 놓고 세례도 주시고, 지역민들 도와 주시려고 개울에 빠져 사진도 찍으시고, 그 당시 서사무장님도 존경스러웠고, 참 그때 미국인 청년 지금은 약 50세가 되겠네요. 저하고는 추억이 많은데 혹시 아시는 분 계시나요 꼭좀 여기에 소식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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