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박해와 제물포 본당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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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박해와 제물포 본당의 창설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08.14 01: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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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방한 특집] 가톨릭교회와 인천사회 1

개항 직후의 제물포개항장


인천의 개항
 

인천(仁川)과 그 앞바다가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무대가 된 것은 조선시대 말부터였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통상 요구가 인천 앞바다를 무대로 점차 거세졌던 것이다. 서울의 관문이며 외국과의 교역 거점이 될 수 있는 인천의 지형적 조건은 결국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요구에 따른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게 하였다. 강화도와 물치도(勿淄島, 지금의 작약도) 앞바다를 무대로 일어난 두 차례의 양요를 일시적으로 물리친 대원군 정권은 그러나 1875년 운양호사건(雲楊號事件)을 빌미로 강제적인 통상을 요구한 일본에 의해 1876년 강화도에서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일명 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자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은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고 1878년엔 동해의 원산진을 그리고 1879년엔 서해의 인천 제물포를 개항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인천이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라의 요지(海門要衝이자 保障重地)이기에 절대 개방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인천의 개항 문제가 나올 것에 대비하여 조선 정부는 이전부터 인천과 부평 연안에 화도진(花島鎭)과 연희진(延喜鎭)의 포대를 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본의 강요를 물리칠 수 없었기에 1881년 2월 28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앞으로 20개월 후에 인천을 개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인천의 조계지 측량을 위하여 본국에 측량선 파견을 요청하였는데 그 사이에 임오군란(1882. 6. 9)이 일어나는 바람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그 뒤 군함 3척을 거느리고 돌아온 하나부사 일행의 강요에 의해 불평등한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7. 17)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명년인 1883년 1월 1일을 기하여 일본인의 도래(渡來)를 허용한다고 선포함으로 인천개항이 임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국신문에 실린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면

1883년 1월 1일 인천 개항에 앞서 1882년에는 인천에 일본 영사관 가청사가 설치되어 최초의 영사가 부임하였고, 5월 22일에는 중국의 중재로 제물포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조인함으로써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어 한영수호조약, 한독수호조약을 조인하였다. 연이어 한로수호통상조약(1884)과 한불수호통상조약(1886)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근대 세계사의 한복판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1883년 1월 1일로 인천이 개항되었다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개항이 이루어진 것은 6월경이었다고 한다. 개항 당시 조그마한 촌락과 어촌마을을 이루었던 제물포 지역은 1883년 초 일단의 일본 상인이 들어오면서 북적대기 시작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영국 상사 이화양행(怡和洋行)이 설치되었다. 이어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오자 제물포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특히 일본과 청국은 각기 거류 지역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국 상인들과의 통상 활동으로 말미암아 관세업무를 취급할 기관인 인천해관(仁川海關, 1883. 6. 16)이 설치되었고, 통상사무를 취급할 감리서(監理署)가 내동의 옛 법원자리에 설치(1883. 8. 19)되었다.

인천감리서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제도가 개편됨에 따라 1895년 5월 1일 폐지되었다가 1년 4개월만인 1896년 8월 7일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1906년 10월 1일부로 단행된 신지방관제(新地方官制)에 따라 일괄 폐지되었고 그 사무는 통감부 이사청(理事廳)으로 이관되었다. 설치 당시 개항 3항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인천감리서의 감리는 부사의 임무와 직위까지 겸직함으로써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옛인천의 급격한 몰락과 함께 제물포를 중심으로 한 개항장이 새로운 인천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천주교의 박해와 인천

 

이처럼 인천은 두 차례의 양요와 개항을 거치면서 급박하게 전개된 정치적, 군사적 흐름 속에서 근대도시로 급격하게 탈바꿈하게 되었지만, 인천이 서양과 접촉하게 된 것은 그 훨씬 이전부터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교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종교활동과 조선인 신자들의 신앙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양 선교사가 입국한 것은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예수회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와 젊은 일본인 수사 후간 에이온(Foucan Eion)이 곰개성(지금의 진해시 지역)에 도착하여 1년 이상 머물렀던 것이 최초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은 당시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던 일본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예수회원들은 이후 여러 차례 조선 전도를 시도하였지만, 양국 사이에 가로놓인 적대 관계와 조선의 쇄국 정책으로 인하여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의 본격적인 서양 문물의 전래는 여러 명목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사신들이 가져온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에 의해 비롯되었다. 이에 관심이 날로 커지면서 서학(西學)이라는 새 학풍이 창출되었고 서학에 대한 이해의 한 방법으로 천주학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었다. 그러나 학문 이상의 관심은 불러일으키지 못하다가 이익(李翼)의 뒤를 이은 기호 지방의 남인 학자들에 의해 종교로서의 천주학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1784년에 북경을 방문한 이승훈(李承薰)이 영세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고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입교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창설을 가져왔다. 한국 교회의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승훈은 서울 문밖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그의 선향은 인천의 동방 외곽지인 반주골(지금의 장수동)이었다.

북경에서 돌아온 이승훈이 1784년 9월 이벽(李檗)에게 세례를 주고, 서울 명례방(明禮方)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집회를 가짐으로써 최초로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은 계층과 지역을 불문하고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조선 정부에 의한 천주교 박해도 점차 심해져 갔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을 시작으로 1791년 조상제사 금지로 야기된 신해박해(辛亥迫害), 그리고 1801년 정치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대규모의 신유박해(辛酉迫害)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유박해의 상황과 한국 교회의 실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백서(帛書)>를 작성한 이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이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인물 중 한 사람인 탄생지 또한 강화읍 월곳리 대묘동이라고 하니, 이승훈 일가의 행적과 함께 생각해보면 인천과 강화는 비교적 일찍부터 카톨릭 문물이 전래되었던 지역이었던 것이다.

정부의 가혹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은 신자들의 노력은 결국 교황청으로 하여금 파리외방전교회의 수락을 얻어 1831년 조선을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로 설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애르(Barthelimy Bruguiere) 주교를 조선 포교지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교가 병으로 입국하지 못하고 대신 모방(Pierre Philiber Maubant) 신부가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37년 앵베르(Laurent Marie Joseph Imbert) 주교가 입국하여 교구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838년말 조선 교회의 신자수가 9천명으로 집계될 정도로 발전하던 때에 인천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조상의 위패를 부수어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1838년 10월 인천의 정바오로가 위패를 부숴 버리자 가족들이 이를 인천부사 이형원(李衡遠)에게 고발하였다. 이에 정바오로는 곧 도망하여 화를 면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인천에 거주하고 있던 50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12명 정도의 신자들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교회 창설 초기부터 계속되온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인천 지역에 신앙의 숨결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의 당쟁이 원인이 되어 1839년에 사학(邪學)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취지로 발표된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으로 시작된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에도 인천에서는 김성임(金成任)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1845년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6년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교수되면서 시작된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도 인천의 여러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를 빌미로 조선원정에 나선 프랑스 함대

대원군의 집정과 함께 시작된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는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와 다블뤼(Marie Antoine Nicolas Daveluy) 주교를 비롯한 많은 외국인 신부와 한국인 신자들이 효수되었다. 천주교 신자뿐만이 아니라 혐의가 있다고 생각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가혹한 박해였다. 그 속에서도 살아남은 칼래(Calais), 페롱(Feron), 리델(Ridel) 신부는 중국 천진에 있던 프랑스 극독함대 사령관 로즈(Rose) 제독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로 인해 일어난 병인양요 때문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전국에서 참혹하게 계속되었다. 인천, 강화에서도 수많은 신자들이 치명하였는데, 황현(黃玹)은 그 수가 2만명에 달한다고 기록하였다.

1866년부터 19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날 때까지 외국 함선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날 때마다 되풀이되었던 박해로 인해 인천의 천주교는 참혹한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이승훈의 집안은 4대에 걸쳐 6명이나 처형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조선이 개국을 하고 여러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야 사라지게 된다. 특히 1886년 6월 4일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하고 나서야 온전히 포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선교의 자유와 신교육

 

활발하던 천주교 전교활동이 대원군 집정 10년간의 가혹한 박해와 탄압으로 인하여 움츠려들어 급기야는 다시 목자 없는 시절로 돌아갔다. 천주교가 시련 속에서 주춤하는 사이 개신교는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 선교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나 한영, 한독수호통상조약 어디에도 포교에 관한 규정은 없었고 다만 외국인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는 조항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 선교사들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 제물포에 함께 상륙한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기독교 선교 사업을 위해 입국한 최초한 선교사들이다. 이들에 앞서 1884년 7월에 감리교측 선교사 맥클레이 목사가 선교 개설 준비를 위해 다녀갔고, 9월에는 알렌이 의료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885년 광혜원(廣惠院)이라는 국립병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조선에서의 기독교 선교 활동은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들어온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서이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아펜셀러는 선교 활동의 일환인 교육사업으로 1885년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웠고,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는 1886년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 부인선교회의 스크랜톤 부인은 188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설립하였다. 이들의 활동에 의하여 조선에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이 설립되고 근대적 교육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정부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학교 경영을 처음에는 묵인하여 오다가 1888년 미국 공사에게 조약에 학교 개설을 통한 종교 포교를 허가한 조문이 없다고 하여 종교 전도를 허가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공사는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제9조 2항의 “언어·과학·예술·법률을 연구하고 교회(敎誨)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가게 되는 프랑스인 ···”이라는 조항을 들어 ‘교회(敎誨)’가 조약의 불문원본에는 교수(敎授)한다는 뜻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병인박해로 인해 자국 신부가 살해되었던 프랑스는 다른 나라보다 신교의 자유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교회(敎誨)’라는 조항을 어렵게 삽입한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이 늦었던 것이다. 항의하는 조선 정부에 대하여 프랑스 정부도 포교권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마침내 조선 정부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최혜국 조항에 의하여 선교 사업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포교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개항지에 한한 것이어서, 지방에서는 수많은 분쟁이 발생하고, 심지어 외교문제화되기도 하였다. 조선인의 신앙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1899년 내부 지방국장 정준시와 뮈텔(閔德孝) 주교(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881년 조선에 입국, 1890년 8월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이후 1933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선 교구에서 사목하였다.) 사이에 약정된 교민조약(敎民條約)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포교권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 이전부터 외국인의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던 개항장 인천에는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일본 종교들이 이미 들어오고 있었다. 조선 포교를 목적으로 했던 기독교는 점차 외국인 사회에 머물지 않고 한국인 사회에 점차 전파되어 갔을 터이니, 인천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경유지에 그치지 않는 한국 최초의 포교지역이었다.

 

제물포 본당의 창설

 

수세기에 걸쳐 혹독한 박해와 탄압에 직면했던 천주교 선교사들은 1886년 한불조약으로 서울과 개항장에서 거주가 허용되었다. 또 필요하다면 대지를 구입하여 건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블랑(한국명 白圭三) 주교는 대성당과 기타 교회에 부속되는 시설에 필요한 대지를 물색, 지금의 명동인 종현 언덕에 넓고 전망 좋은 대지를 매입하여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88년 한성부에서 그 땅이 국유지이며 선왕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의 수호신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들어 갑자기 그 땅에 대한 억류를 발표하였다. 이에 불랑 주교는 종현 성당의 건축 공사를 중단하고 개항지의 본당 건설을 추진하였다.

1887년 개항지 원산에 본당을 설립한 주교는 이어 상업이 번창하고 수도의 관문인 제물포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교구 경리부의 코스트(高宜善) 신부가 제물포의 성당 부지 매입을 위하여 1888년 9월 20일 파견되게 되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교세통계표, 부록 연표????, 인천교구사 제4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150면) 코스트 신부는 독일 회사의 소유지와 조선 관리의 땅 사이 언덕에 있는 땅을 적절한 교회 부지로 발견하였으나 매입 작업이 여러 문제로 진적이 없었다. 이에 블랑 주교는 성당 건립에 앞서 빌렘(洪錫九) 신부를 인천의 초대 본당신부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빌렘 신부는 1889년 7월 1일 인천에 부임, 이로써 제물포 본당이 창설되었다.
 

초대 제물포 본당의 주임신부인 빌렘 신부(1860-1938)는 1883년 사제 서품을 받고 1888년 조선 교구로 배속되어 1889년 2월 입국, 그해 7월부터 1990년까지 인천에서 사목하였다. 그가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안중근과 관련해서이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또오 사살 혐의로 안중근이 체포되자 감옥으로 찾아가 격려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는 다시 찾아가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의 안중근 방문은 교구장 뮈텔 주교의 뜻을 거슬린 행동이었고, 다른 신부들과의 불화로 1914년 이 땅을 떠났다.(오경환, ?안중근과 인천 천주교 초대주임 빌렘 신부?, <황해문화>, 1994. 봄호)

그러면 빌렘 신부가 부임하기 직전의 제물포 상황은 어떠했는가. 당시의 기록을 보기로 하자.

 

서울에서 도보로 하루 길이 되는 곳에 비교적 상업이 번창한 항구 제물포 또는 인천이라고 하는 곳에 선교사 한 명이 배치되었읍니다. 상인들과 세관 직원들이 사는 외국인 거류지 근처에 주민 2,000명 가량이 되는 커다란 조선 사람 마을이 형성되어 있읍니다. 교우라고는 조선 사람 59명과 장사하러 거기 와 있는 일본 사람 25명 뿐입니다. 빌렘 신부는 그들 사이에서 성직을 더 쉽게 수행할 수 있도록 일본말을 배우기 시작할 참입니다.(?1889년 연말보고서?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의 전사>, 인천교구사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33면에서 재인용)

 

“비교적 상업이 번창한 항구” 제물포에는 4,000여명의 외국인과 2,000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는 84명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자들이 모일 장소가 없었다. 그들은 흩어져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노동이나 소규모의 장사를 하며 무척 조심스런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천 교우들의 신앙은 견고한 편이었다고 한다. 빌렘 신부는 8월부터 성사 집전을 시작했는데 많은 교유들이 성사를 받았다. 그리하여 1890년 9월 2일자 빌렘 신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제물포에는 8.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교우수는 112명이고 예비자가 20여명 있었다고 한다. 1년 사이에 28명의 신자가 증가한 것이다.

같은 해 빌렘 신부는 현 답동본당이 자리한 언덕에 3,212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원래는 외국인의 왕래가 잦고 주민들이 모여사는 하인천에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장래의 발전 가능성이 적은 것 같아 답동 언덕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 땅은 원래 시유지(市有地)였다. 이를 당시 인천 감리였던 민선훈(요셉)이 본당에 기부하는 셈으로 엽전 25냥에 파는 것으로 희사하였다. 그리하여 7월에 임시 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서울교구 연보> 1, 천주교 명동교회, 1984)


제물포본당 성당 종 축성식 장면(1900년 4월 17일)


제물포 본당이 이처럼 기초를 잡아가는 것과 함께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다. 인종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혼합되어 있는 개항지 인천은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도덕 관념이나 종교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고 빌렘 신부는 보고하고 있다. 또 다른 어려움은 개신교와의 마찰이다. 서울과 달리 천주교보다 먼저 자리를 잡은 개신교의 여러 교파는 천주교가 뒤늦게 본당을 창설하고 신부를 파견하자 여러가지 측면에서 견재하였던 것 같다. 새로 전도사를 파견하여 좋은 보수를 주기도 하고 일본 호텔의 큰 홀에서 주일 예배를 봄으로써 청중을 끌어들이려 하기도 했으며, 제물포 본당에서 성당을 지으려고 땅을 매입하자 개신교 측에서는 교리 강의실 건축 공사에 착수하는 등, 인천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빌렘 신부, ?1890년 연말보고서?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문>, 인천교구사 제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4-5면)

이러한 상황에 처한 빌렘 신부는 한국을 잘 모르고, 게다가 수많은 일상사에 시달리며 일본어 학습에 임하고 있는 자신이 제물포 본당에 적임자가 아니라며, 한국말을 장하고 정력이 있으며 체험이 있는 선교사로 대체해줄 것을 교구 당구에 부탁하였다. 이에 교구 당국은 빌렘 신부의 사표를 수리하고 1890년 11월 르 비엘(申三德) 신부를 제물포 본당의 제2대 주임신부로 파견하였다.

르 비엘 신부는 빌렘 신부가 매입해 둔 대지에 1891년 7월 31일 경리부로 쓸 집 한 채를 짓고, 그 안에 조그만 성당을 마련하였다. “교유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주위의 나쁜 영향과 싸우기 위해 서로 단결하기는커녕 장사꾼들 사이의 경쟁이나 양반들의 교만 때문에 서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신자수는 계속 늘어 1891년에는 148명, 1892년에는 192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1892년 3월 30일에는 뮈텔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제물포 본당에서 견진성사가 거행되었다.

8월에는 청국인들이 신부의 하인 2명을 때린 사건을 발생하여 르 비엘 신부가 청국인 2명을 청국 경비대에 넘기고 소송을 제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청국 여사도 무례한 편지만을 보내오면서 사건은 확대되어 신부가 프랑스 공사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고 원세개가 사과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시 개항지 인천의 복잡한 정세가 드러난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제물포 본당은 지역 안에 굳건히 자리를 잡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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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호 2014-08-19 15:20:05
미국이 아니라 영국과 수교맺을때 그림인데요. 물론 비슷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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