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타임 3년, 친일파는 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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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 3년, 친일파는 안전했다
  • 김현석 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
  • 승인 2014.08.15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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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집] 반민특위와 인천 1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만들고 반민특위 설립의 근거를 마련한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회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여론이 들끓어도 그들은 여전히 떵떵거렸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도 전과 다름없이 잘 먹고 잘 살았다. 권력은 그들에게 있었고 식민지를 겪은 민중들에게 자유와 인권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다. 달라진 게 없었다.

친일파는 청산되지 못했다. ‘반민족’은 반공이라는 말로 덮였다. 광복 후 친일·반민족 행위로 체포된 700여 명 중 실형을 받은 이는 겨우 열 명이었다.(허정,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정리되지 못한 역사는 현재를 건드린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친일 청산’을 얘기하면 ‘좌익’으로, ‘평화’를 얘기하면 ‘종북주의자’로 몰아간다. 권력형 부패는 당연시되고 정의를 지켜봐야 손해라는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 정의에 대한 이러한 패배의식은 광복 후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친일파 청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공과가 상당부분 땅 속에 묻히면서 우리는 왜곡된 과거 속에 국가를 세웠다. ‘해방공간 3년’, 참 안타까운 시간이다. 이 골든타임을 제대로 보냈다면 대한민국은 적어도 상식이 탄압받는 사회는 되지 않았을 거다.

광복 직후 친일파 처리 문제가 거론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할 지도자도, 책임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없었다. 미군정하에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친일파 문제, 혹은 반민족 행위의 문제가 공식적으로 토론의 장에 등장한 건 1948년 6월 28일 개최된 제헌의회 본회의 석상에서였다. 이날은 유진오의 초안을 바탕으로 30명의 헌법기초위원과 10명의 각계 전문가들이 그동안 검토한 헌법기초안을 공개하는 날이었다. 6월 3일 구성된 헌법기초위원회는 6월 22일까지 20여 일 가량 회의를 거쳐 기초안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는 헌법을 처음 만드는 시간으로는 꽤 짧은 날들이었다.

헌법의 전문은 조헌영 의원이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헌법기초위원회 서상일 위원장은 헌법 초안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의 노선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독재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느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느냐 하는 데 있어서 이 헌법 정신은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한 기본계획도를 여기에 만들어낸 것입니다”라는 말을 분명히 했다.

얼핏 흘려들을 수도 있지만 독재주의 공산국가와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양립해 놓고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는 이러한 헌법 제정의 기본 정신은 이후 대한민국의 앞날을 예견하는 발언이었다. 이날 처음 제10장 ‘부칙’ 제100조로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는 조항이 소개됐다. 그러나 큰 논의가 진행되지는 못했다. 서상일이 “10장 부칙에 있어서의 특수한 점은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우리 국회에서 제정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서 이 조문을 넣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라고 짤막하게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끝났다. 유진오가 직접 나와 내각중심제와 대통령중심제에 대한 부가 설명을 하고 이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나머지 시간들이 채워졌다.

부칙 제100조에 대한 문제는 7월 6일의 회의에서 다시 거론됐다. ‘제정할 수 있다’라는 말이 너무 소극적이니 ‘제정한다’로 바꾸라고 요구하는 등 사소한 문제들도 지적됐지만 가장 크게 의견 차이를 보인 건 시점의 문제였다. 8·15 광복 이전에 반민족적 행위를 한 사람만 처벌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반민족적 행위를 한 사람을 처단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앞으로도 반민족적 행위를 한 사람은 언제든지 법률로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해 둘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려는 의도는 조옥현 의원의 문제 제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조옥현 의원은 “해방 이전에 너무 악질적인 반민족적 행위를 한 그 사람만 규정이 됐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반민족적 행위를 하는 사람은 하등 규정이 없으므로 나는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운을 뗀 뒤 “민족과 국가 전체를 어떤 나라의 속국이 되겠다는 이런 모든 파괴분자의 행동 이것은 반민족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라 규정하겠습니까?”라고 그 속내를 내비쳤다. 그리고 헌법 제정 이전에 악질적 반민족적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결의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건 분명 북한과 같은 공산국가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을 테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념을 문제 삼아 공안 정국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이 발언 속에는 친일파와 좌익 문제를 서로 섞어 놓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신현돈 의원이 그러한 의도를 간파했다. “좌익진영을 또한 반역자라고 규정합니다. 또 민족진영에 있는 사람은 또한 좌익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반역자라고 합니다. 이 반민족적 행동이라는 것은 규정이 물론 주관적 관념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고 모든 잘못한 것을 처벌하려고 규명할 때에는 우리가 관대한 생각으로 포옹한다는 정치 아량이 없고는 안 된다고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이 반역행동이라든지 간상배라고 하는 이러한 문구를 시행한다고 하면 정부가 조직된 후 무한한 혼란을 일으키겠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될 줄 압니다.” 결국 수정안은 부결되고 원안이 그대로 통과됐다. 이로써 반민족행위처벌법과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반민법과 반민특위는 불완전하다고는 해도 우리가 새 국가 건설의 긴 여정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해방공간 3년’을 뒤로 하고 반민특위는 어떠한 활동들을 하였을까. 체포된 반민족행위자들의 이후 행로는 어떠했을까. 지금의 인천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도 반드시 풀어야 될 문제다.

 

사진출처=KBS <인물현대사> 58회 '미완의 역사, 친일청산-반민특위 김상덕 편 캡쳐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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