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오롯이 이발사 인생... “아들이 잘 물려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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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오롯이 이발사 인생... “아들이 잘 물려받길”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6.05.2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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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이후 자리 지켜온 경기이용샵 정점영-정용성 부자(父子) 이발사를 만나다

 
언제부턴가 ‘이발소’라는 곳이 추억 속으로 저물고 있는 듯하다. 실제 국내에 개봉된 영화에서 오래된 분위기를 살리는 데에 있어 이발소는 적절한 아이템이기도 했는데, 실제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0년 전국 1,826곳이었던 인천지역의 이발소는 2013년 말 기준 828곳으로 절반 넘게 줄었다. 이를 아쉬워하던 인천시가 그해 8월 전국 최초로 ‘이발소 살리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일부 오래된 분위기를 아직 갖고 있는 신포동-동인천에는 지역서 오랜 기간 활동해온 이발사들이 영업을 하며 이발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네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서부터 원래 찾던 손님들이 먼 거리로 이사를 했음에도 오랜 기간 자신의 머리를 맡겼던 이발사들에게 계속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포동 로데오거리 입구에서 동인천으로 오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경기이용샵’은 특히 지역에서 주목할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의 주인장으로 벌써 40년 넘게 이발사로서 활약해온 정점영 이발사는 오늘도 손님들의 머리를 매만지며, ‘이발사’라는 직업에 ‘묵묵하지만 충실한’ 걸음을 걷고 있다.
 
◆ 70년대 인천행... 이발하며 ‘찡한’ 순간도
 
1955년 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난 정 이발사가 인천에 온 것은 1970년대 후반, 그의 나이 20대 초중반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이미 고향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하고 15세 때 이발업에 입문했다는 그는 처음엔 인천지역에 지천이었던 다른 이발소의 직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 첫 이발소에서만 ‘장기근속’에 해당하는 9년을 있었다고 하니 이발사로서의 성실성은 일찍부터 지역 업계에서 알아줬을 정도. 이후 잠시 다른 곳으로 떠났다가 다시 왔더니 그 이발소는 없어져 있었다고.
 
이후 그는 ‘자신이 직접 차려보자’는 마음으로 1988년 지금의 경기이용샵을 오픈했다. “오픈했던 날 뿌듯한 마음이 있었겠다”고 물어도 크게 동의하는 자세보다는 “내 영업이니까 남의 집보다는 낫었지”라며 담담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 업종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겠다 싶다.
 
기자가 이발관을 방문한 날에는 한 어르신이 정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 이발사는 “저 어르신도 나한테 40년 머리를 맡긴 단골인데, 지금 구월동으로 이사를 가셨는데도 여기에서만 이발을 하신다”고 말했다. 아마 그렇게 장기간 머리를 맡기는 손님들이 많지 않겠느냐 물으니, “고마운 분들이 계속 단골을 해주셔서, 단순한 고객이 아닌 인간적인 정을 나누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이에 기자가 “그럼 오래 된 분들 중 돌아가신 분들도 많으시겠다”고 묻자, ‘마지막 이발’을 해드린 분들도 많다고 전한다. 단골들 중 임종을 맞은 분들이 있으면 직계가족들이 직접 전화를 해 그분의 마지막 이발을 부탁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고. 마치 의사가 왕진하는 것처럼 출장을 가서 이발을 해 드리는데, 그때마다 그는 “잘 아는 분께서 죽음의 문을 건너기 직전 상황에 마지막 단장을 해 드린다고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정성껏 이발을 해 드릴 때도 꽤 많다”고 전했다.
 

고객의 머리를 염색작업 중인 정점영 이발사.
 
◆ 소박한 동네 이발사의 소박한 철학, “이발해서 먹고 살면 그게 행복”
 
이제 ‘순수한 의미로서의 이발관’이 대세에 밀려 사라지는 상황은 기정사실화가 된 상황이다. 실제 인천지역의 경우 앞서 언급했던 ‘절반 넘게 줄었다’는 수치는 같은 기간 줄어든 전국 비율 40%보다 높기도 했다. 동종업계로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정 이발사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 역시 “신세대들이 이발사 기술을 배우지 않아 기술자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나, 좀 크다 싶은 도로변에 이발소들이 거의 없는 상황은 아쉽다”고 전했다(참고로 경기이용샵은 아직 큰 도로변에 위치하고는 있다.). 그래도 그는 “비슷하신 시기에 시작하신 분들이 운영하는 이발관 몇 집들이 동네 골목골목 혹은 주거단지에서 명맥을 지키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 이발사가 특히 고마워하는 부분 중 하나는 단골 중에 적잖이 젊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중후반 10대를 보낸 친구들 중 몇 명이 그때의 추억을 갖고 머리를 맡기러 온다는 것. 실제 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온 상황에서도 젊은 손님이 한 명 보였는데 10대 때부터 머리를 하러 오는 단골이라고 했다. 비슷한 성격의 단골들이 있느냐 묻자 “대부분 그때 줄 서서 머리 맡겼던 친구들 중 몇 명이 잊지 못하고 찾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학생들의 짧은 머리를 미용실에서 잘 소화를 못 하다 보니, 남학생들 사이에서 정 이발사의 ‘손기술’이 입소문을 타면서 한때는 줄을 서서 머리를 맡기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소수가 정 이발사를 잊지 못해 다시 찾고 있는 거라고 했다. 혹시 10대들의 방문도 꽤 있느냐 물으니, 그렇지는 않다면서 “지금은 대부분 학생들의 두발이 자율화가 되면서, 주변에 지천인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는 학생들이 늘다 보니 10대는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전했다.
 
시대의 변화에 의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발관을 지켜 나가는 원동력이 혹시 있느냐 물으니 “이발사가 이발해서 먹고 살면 되는 거지, 크게 마음을 먹는 건 아니다”라는 담담한 답을 해온다. 이 역시 업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베테랑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 한 곳에서 오래도록 이발업에 충실해온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근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역시 정 이발사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건물주와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그는 “인심이 팍팍한 시대에 어쩌면 복 받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라면서도 “지역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소식을 많이 듣는데 사실 안타까운 마음도 있다”고 말했다.
 
◆ “아들이 가업 잇고, 후배들 성공하면 큰 보람일 것”
 
무엇보다 정 이발사의 가장 큰 보람이라면 자신이 키워낸 후배들이 이발사로서도 잘 되는 모습을 볼 때라고 한다. 그는 “이곳이 1996년만 해도 나와 제자들까지 8명이 일하는 콘 곳이었는데, 그 친구들이 나한테 최소 5년에서 많게는 10년까지 배우다 독립했는데 한 명이 미용업계로 전환한 것 외에는 이발사로서 다들 성공해 뿌듯한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제 90년대 초반 유행했던 잔디머리나 레옹 스타일 등을 이곳에서는 우리가 제일 먼저 했다고 봐도 된다”며 웃기도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정용성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
 
경기이용샵이 앞으로도 ‘낙관적인 명맥 유지’를 할 수 있겠다 예상하는 이유는 바로 정 이발사의 아들이 그의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발업이 시대에 의해 저무는 업종이 됐음에도, 아버지가 이룩한 흔적들을 지키기 위해 아들 자신이 자처했다는 것.
 
그러고 보니 그의 아들 정용성씨의 이력이 참으로 특이하다. 낮에는 이발사로, 밤에는 록 밴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는 이른바 ‘투잡스’족이기 때문. 록 밴드도 하나만 하는 게 아니다. 인천 출신의 홍대 인디 밴드로 정규 음반까지 내면서 제법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R4-19과,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한 서울의 헤비메탈 밴드 ‘서울 마더스’에서 동시에 활동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멤버들 모두가 평소에는 직장인 및 사업가로 뛰고 있는 R4-19의 경우 다른 비슷한 형편의 프로 밴드들과 함께 ‘주Work야Rock’라는 이름의 기획 콘서트를 하고 있기도 하다.
 
아들 용성씨에게 ‘낮에는 가위질, 밤에는 기타질’을 하는데 힘은 안 드냐 물으니, 전혀 그런 건 없다고 한다. 특히 음악을 할 때 피곤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용성씨는 “이발업이라는 게 한 곳에 오래도록 서서 일을 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매너리즘도 자주 오는 편인데, 의외로 음악을 겸업하면서 매너리즘이 극복되는 장점이 있다”면서 “가위를 잡았을 때는 프로 이발사로, 또 기타를 잡았을 때는 프로 기타리스트로서 인정을 받고 있어서 특히 요즘 너무 뿌듯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혹여 “음악을 하는 것에 아버지 반대는 없었느냐”고 묻자 “아버지 자체가 워낙 개방적이시고 젊은 친구들하고도 많이 대화를 하시는 분이어서, 처음 음악 한다고 했을 때도 한 마디 반대를 안 하셨다”고 했다. 또 용성씨는 “아버지가 문화나 트렌드에 무척 밝은 분이라 나이가 드셨어도 유행을 잘 잡으신다”면서 “이발도 음악만큼 대단한 예술 장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 따라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전했다. 용성씨는 “정작 문제는 나한테 있어요”라면서 웃었다. 공연을 주로 주말에 많이 하는데, 이발업이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지라 스케줄 등의 조율이 다소 힘든 부분은 있다는 것. 다만 지금까지는 문제없이 해 오고 있다고 전했다.
 
◆ 아들 정용성씨 “이발업이 생소한 세상 된 것은 다소 아쉬워”
 
올해 마흔이 된 용성씨 나이 또래에는 사실 이발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에 “친구들이 생소하게 느끼지 않느냐”고 물으니, “사실 부분적으로 그런 건 있다”고 했다. 옛날에 비해 대중화된 직업이 아니다 보니 생소히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부분이 이발업 종사자로서 약간의 아쉬움은 든다는 것. 그래도 용성씨는 “아버지 가업을 물려받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이는 모두 아버지의 배려로 가능했다고 한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남자 아이로 태어나서 아버지와 가까워지는 것이 보통은 힘든 상황인데, 자신은 아버지와 늘 사이좋게 붙어 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일부 친구들에게서는 “쟤는 어떻게 아버지랑 365일을 매일 보고 사냐”는 반응도 나온다며 웃기도 했다.
 
다시 아버지인 정 이발사에게 눈길을 돌려 “향후 이 공간이 지역에 어떻게 남았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역시 그는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했다. 그저 “손님이 와야 지킬 수 있는 현실적 문제는 있긴 하겠지만 내 힘 닿는 데까지는 이발사로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 거고, 아들은 나보다 더 멋지게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가업을 잇는 자신의 아들이 이를 잘 해낼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동시에 그는 <인천in>과 <놀던동네늬우스>에게는 “지역과 동네의 좋은 정보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느냐”며 향후로도 역할을 잘 해줄 것을 당부했다. 지역 매체를 통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 역시, 지역에서라도 많은 조명을 받고 잘 돼서 동네가 활기를 띄는 데에 일조했으면 한다는 바람일 것이리라.

 

경기이발관의 전경은 소위 '시대의 요구사항(?)'에 맞게 옛날식 이발소와는 다소 다른 인테리어를 하고 있지만, 옛날에만 볼 수 있었던 이발소 의자와 바로 앞에 위치한 세면대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 본 기사는 ‘놀던동네늬우스’와의 협약으로 진행돼 <인천in>과 놀던동네늬우스 두 매체에 같은 날 동시에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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