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적도의 어업관련 지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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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의 어업관련 지명들
  • 이세기
  • 승인 2016.05.12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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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섬이야기⑮] 이세기 / 시인

<북리항 전경>

덕적도에는 어업과 관련된 지명이 유난히 많다. 덕적도가 안강망 어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서해도서(韓國西海島嶼)』에 의하면 1939년에만 해도 덕적도에 중선(대형목선)이 140여 척이나 있었다. 이들 중선은 조기를 따라서 북으로는 평안북도 의주 앞바다까지, 서쪽으로는 대련항로를 따라 황해 일대, 남으로는 칠산, 흑산도, 제주도까지 출어를 했다. 3, 4월에는 연평도에서 조기잡이를 했고, 5월부터 7월까지는 소치도, 굴업도, 울도 등지에서 민어잡이를 했다.

조기잡이의 휴어기(休漁期)라 할 수 있는 7월은 육젓용 새우잡이, 9월부터 10월까지는 추젓용 새우잡이를 했고, 11월에는 숭어잡이, 12월 중순까지 황해도 대소청도 주변에서 낚시질로 홍어잡이를 했다. 12월부터 2월까지 삼개월 간은 동절기 휴어기로 선체와 어구 정비를 했다.

백아도에서는 3월 중순부터 5월말까지 조기잡이, 6월부터 7월까지 갈치잡이, 7월 말에서 8월 초에 걸쳐서는 육젓용 새우잡이와 민어잡이, 9월부터 10월까지는 추젓용 새우잡이를 했다. 이로 인하여 이 일대는 온통 칸델라의 불빛으로 장광설이었다. 바다가 곧 환한 불천지였다. 덕적팔경에 나오는 울도어화(蔚島漁火)가 이로부터 연유한다.

덕적군도의 섬들은 1910년 이후 뱅이어장 일대에서 새우가 지천으로 잡히면서 황금어장을 구가했다. 섬마다 해변에 독강이 만들어지고, 이곳에서 새우를 쪄서 가마니에 말려 새우 건작(乾作)을 했다. 이렇게 만든 건새우는 중국으로 팔려갔다. 인천의 청관(淸官) 상인들이 건새우를 사서 중국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건새우는 배추를 볶아 내놓는 청요리 재료로 쓰였다. 해풍에 잘 말린 값싸고 질좋은 건새우는 상해와 대련, 천진 등으로 팔려나갔다. 덕적군도에서 새우는 70년 초까지 성업했다. 하지만 성업이라고 해도 1910년대 황금어장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덕적도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같은 날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배들 타다 풍랑을 만나 같은 날 바다의 원혼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우스갯소리로 ‘조금에 낳은 아이’가 많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안강망 어업이 주로 사리 때 투망을 하고 조금 때 항구로 들어오는 터라, 이때 낳은 아이들이 많았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이 당시 어업과 관련된 지명이 덕적도에 남아있다. 덕적군도 일대에 새우, 민어잡이가 한창이던 때, 작은 쑥개에는 ‘갈가마터’가 있었다. 갈가마터는 그물 염색을 하던 터다. 참나무 껍질을 오래 끓이면 강엿처럼 진액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순면 그물을 염색해서 썼다. 이를 뱃사람들은 ‘갈물 들인다’, ‘갈무리 한다’라고 했다.

소재 해변가에는 ‘얼음 창고’가 있었다. 능동 방죽개 논에서 겨울에 언 얼음을 톱으로 잘라 바닥에 솔잎을 깔고 층층히 쌓아 저장했다. 고깃배들의 생선 저장용으로 쓰기 위해 출어시 얼음을 싣고 나갔다. 얼음 창고는 서포리에도 있었다. 겨울에 염전 주변의 논에서 꽁꽁 언 얼음을 잘라 모래 사구에 모래굴을 만들어 저장했다가 출어 시에 얼음을 싣고 나갔다.

‘숯 굽는터’도 있다. 숯은 안강망배의 밥 짓는 탄으로 제공되었다. 덕적도는 산림이 울창해서 신탄(薪炭)을 만들기 좋았고 인천과 서산 등지에 제염용 신탄을 공급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바름배(風岩) 가까이에 ‘숯 굽는터’가 있다. 질 좋은 참나무로 숯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통갯목에는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도 있었다. 염전에서 얻은 소금으로 조기, 민어, 새우 등을 염장해서 인천, 안산, 서산, 대산 등지로 내다 팔았다. 새우가 한창 잡힐 때인 50년대에는 문갑도의 독공장 기술자를 덕적도 큰쑥개로 데려와서 새우젓독과 항아리를 만들어 인천 등지에 판매했다.

이외에도 어업관련 지명으로는 ‘배상터’와 ‘삼신샘’이 있다. 배상터는 지금의 서포리 해수욕장으로 예전에는 이곳에서 배를 짓거나 정월 대보름에 굿을 하고 짚배(대성배, 띠배)를 만들어 바다로 띄어 보냈다. 마을의 액을 물리치고 안녕을 소망했다. 배상터는 국수봉 아래 당산과 더불어 이곳에 국수당이라는 당터를 만들어 마을의 안녕을 빌기도 했다. 삼신샘은 덕적도의 영산인 국수봉 줄기에서 내려온 샘물로, 민어 파시가 한창일 때 이 물로 풍어제 뱃고사를 지냈다.



<중선배(일명 나가사키배)>


<안강망 목선을 짓던 연장들>


덕적도 북리는 안강망 어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풍선(風船)에서 중선배(일명 나가사키배)를 처음으로 도입한 곳도 바로 덕적도 북리이다. 북리에 나가사키 중선배를 짓기 위한 도목수들이 많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배를 짓는 목수들의 자귀소리와 물메기 하는 망치소리로 가득했다. 7∼9명으로 이루어진 목수들은 세 달에 한 척 정도의 안강망 목선을 건조했다. 나무는 주로 일본 스키나무를 이용했고, 부분적으로 참나무와 소나무 등을 사용했다.

1960년대 북리항 파시는 일대장관이었다. 큰쑥개에서 작은 쑥개에 이르는 어항이 안강망 어선으로 가득했다. 조금 때면 사릿물을 보고 대처에서 몰려온 안강망배로 인하여 배다리가 따로 없었다. 뱃고사와 북적이는 사람들로 부둣가와 골목은 흥성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배곯던 아이들이 안강망 화장이 되어, 배를 타서 보름 조업을 다녀오면 얼굴과 몸에 살이 통통하게 올랐을 정도였다. ‘작은 인천’이라 별칭할 만큼 이 작은 어항에는 극장, 공중목욕탕, 약방, 당구장, 작사집들이 즐비했다. 별천지였다.

하지만 뱃사람들의 고단함도 묻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뱃일은 험난한 파도와 싸우는 목숨을 건 직업이기에 뭍에 발을 내딛는 정박 시기에는 작사(酌舍)에 빠지지 않는 선원이 없을 정도로 일이 고되었다. 3.7제로 받은 대부분의 수입이 작사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풍랑을 견디며,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던 뱃사람들은 태풍으로 순식간에 불귀의 몸이 되기도 했다. 능동에 있는 ‘조난자 위령비’는 이들을 기리는 조난비이다.

안강망 어업의 역사를 품고 있는 북리이지만 지금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60년대말 연평도와 뱅이어장 등에서 조기, 민어, 새우가 잡히지 않아 어장이 쇠락하면서 북리항 역시 폐항이 되다시피했다. 이로 인하여 풍성했던 섬문화의 보고도 종적을 감추었다.

장소를 잃어버리는 것은 삶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북리에 서해의 황금어장 시절의 주인이었던 안강망 어업을 기리는 ‘안강망어업박물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 출어 뱃고사를 지내기 위해 물을 길렀다는 삼신샘, 안강망 배를 짓던 도목수와 뱃터, 당산, 이와 더불어 덕적도 섬 전체에 어업관련한 지명 장소가 살아있기 때문에 이를 잘 활용한다면 덕적도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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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허YouTuae 2017-08-22 17:20:13
저3학년인데좋은거보내주셔서감사드려요ㅠㅜ숙재로딱이네여!!감사드려요ㅠㅜㅠ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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