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보는 인천 노동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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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보는 인천 노동운동사
  • 이한수
  • 승인 2016.05.2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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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 (16) 인간문제/강경애


대학교 3학년 때 공장에 취업을 하려고 구로공단 인근에서 한동안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 의당 구로공단이겠거니 했던 거지요. 그런데 그때 구로공단과 같이 염두에 두었던 게 인천이었습니다. 낯선 곳이라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읽으며 인천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잠재되었던 지향(指向)이 결국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나 봅니다. 1993년에 인천에 왔으니 벌써 24년이 되었네요. 인천 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젊은이가 생면부지의 낯선 곳임에도 불구하고 터 잡을 궁리를 할 만큼 인천은 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릴 만한 도시였습니다. 70년대 노동자와 빈민의 삶과 투쟁을 그린 소설로 가장 많이 읽힌 작품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작가 ‘유동우’가 1973년에 직접 겪은 인천 ‘삼원섬유’ 노동운동을 기록한 작품이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인천 만석동 이야기를 일부 담고 있습니다.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도 ‘똥물 테러’로 유명한 1978년 인천 만석동 동일방직 투쟁을 기록한 수기입니다. 70년대 노동운동을 형상화한 대부분의 작품이 인천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80년대에는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이 쏟아져 나오는데 1986년 인천 부평공단을 배경으로 한 ‘차주옥’의 [함께 가자 우리], 1987년 인천 주안의 주물공장 파업 투쟁을 그린 ‘정화진’의 <쇳물처럼>, 1989년 인천 주안공단 ‘세창물산’ 위장폐업 저지투쟁을 그린 ‘방현석‘의 [새벽출정] 등 유명한 작품들이 죄다 인천의 노동운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1986년 ’신흥정밀‘ 박영진 열사 분신 사망 사건을 그린 ’안재성‘의 [파업]과 같이 서울 구로공단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더러 있지만 70년대부터 면면히 이어온 노동운동을 그려낸 작품들이 대부분 인천을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어떻게 인천에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었을까요. 더 거슬러 올라가 그 연원을 찾고 싶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이미 인천에서 대공장 노동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 주는 작품이 있습니다. 1934년에 발표된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읽으면 근 1세기 전에 벌써 조직화된 노동조합 운동이 시작되는 현장을 목도(目睹)하는 듯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독재정권의 폭압으로 위대한 노동운동의 역사가 단절된 데에 대한 한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늘 지나다녔던 괭이부리 마을과 만석부두, 자유공원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골목골목이 지나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답동성당, 인천항, 서공원(개항 이후 만국공원, 전쟁 이후 자유공원), 만석동을 오가며 노동자 조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인물들의 발길을 되짚어 가봅니다.
 
[인간문제] 주인공 ‘선비’는 황해도 용연마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서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마을의 지주 ‘정덕호’의 몸종으로 들어가 갖은 학대에 시달리다가 인천으로 도망쳐 옵니다. ‘선비’를 사모하는 ‘첫째’도 부쳐먹던 땅을 지주 ‘정덕호’에게 빼앗기고 인천으로 와 부두 노동자가 됩니다. ‘정덕호’의 딸 ‘옥점’의 남자 친구 ‘신철’은 용연마을에 놀러왔다가 ‘첫째’와 ‘선비’를 알게 되고 나중에 노동자 조직 운동을 하기 위해 인천에 왔다가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주인공 ‘선비’는 작가 강경애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작가 강경애는 수필 <나의 어린 시절>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5세에 아버지를 여윈 나는 일곱 살에 고향인 송화를 등지고 장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는 생계가 곤란하시므로 더구나 장차 의지할 아들도 없고 다만 딸자식인 나를 믿고 언제까지나 살아가실 수 없는 고로 개가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의붓아버지에게는 남매가 있었으니 남아는 16,7세 가량이었으며 계집애는 내 한 살 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온 지 이틀도 지나기 전에 벌써 우리들은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선비’를 남몰래 연모하는 ‘신철’은 작가의 남편 ‘장하일’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인천에서 남펀 ‘장하일’과 함께 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가담한 적이 있다는 것을 여러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경애는 남편 ‘장하일’과 1931년 간도로 가기 전에 인천에 얼마간 머문 적이 있고 간도 용정으로 가 ‘동흥중학교’에서 교사가 된 남편 ‘장하일’은 자주 인천에 와 노동조합 조직 사업을 지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1935년에 인천 ‘동양방적’ 노동자를 의식화 조직화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소설 [인간문제]를 읽다 보면 이 글이 수기(手記)가 아닌가 할 만큼 인천 부두 주변이 꼼꼼하 묘사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인천에서 살면서 도시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기록했던 모양입니다. ‘신철’이 노동자 조직 사업을 위해 인천에 왔을 때 답동성당 부근에 셋방을 얻어 사는데 부두 노동을 하다가 ‘첫째’를 우연히 만나 자기가 사는 집을 알려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정(寺町)으로 올라가누라면 천주교당이 있지요. 그 집을 지나 공동변소가 있지유. 그 우에 장작 패어 파는 집이 있습니다. 바루 그 우에 조고만 초가집이 있지우. 그 집 뒷방이 바루 나 있는 방이오“ 여기서 ‘사정’은 지금의 인천여상 주변입니다. 답동성당에서 가까운 인천여상은 일제시대에 일본 신사(神社)가 있던 자리이고 그 주변에 사찰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사정(寺町, 테라마찌, 사찰거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진은 해방 전후인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다 쪽에서 바라본 일본 신사(현 인천여상) 주변의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가운데 전통 건물이 일본신사이고 왼쪽 끝에 신흥학교와 답동성당이 나란히 보입니다. 작가 강경애가 목격한 1930년대 인천 사동 근처, ‘신철’이 살았던 동네의 실제 모습이 이러했습니다. 인텔리 ‘신철’은 노동운동을 하려고 인천에 와서 부두 노동자로 며칠 일해보지만 일이 너무 고되어 감당을 못합니다. 타고난 농군이었던 ‘첫째’는 항만 하역 노동, 월미도 제방 쌓는 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부두 노동자의 파업을 겪으면서 각성된 노동자로 거듭납니다. 작가 강경애는 1935년에 일어난 인천항 부두 노동자 파업을 다음과 같이 그렸습니다.

 

1930년대 인천항 부두 노동자 (인천항운노동조합)
 

“축항에는 기선이 죽 들어와서 부두에 대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때 노동자 몇 사람은 그들의 대표로 요구조건을 제출하려고 해륙운수조합 사무실로 들어갔다. 해가 벌겋게 타올랐다. 그들은 저 해를 바라보면서 단결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의 저 햇발은 그들의 이 단결함을 보기 위하여 저렇게 씩씩하게 솟아오르는 듯하였다. 인천의 시민들은 종래에 없던 부두 노동자들의 단결을 구경하기 위하여 골목골목에 나와 섰다. 그리고 끊임없이 경관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다. 그래서 축항을 둘러싸고 무서운 대지로 공기가 팽팽히 긴장되어 있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가 있었다.” - 강경애 [인간문제] 中 -
 

[인간문제]는 우리나라 대공장 노동운동을 그린 최초의 소설로서 의미가 큰 작품입니다. 1932년 만석동에 일본인 기업 동양방적 공장이 세워질 때부터 1935년 1월에 일어난 동양방적 노동자 의식화 유인물 경찰조사 사건까지의 일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고향에서 지주의 몸종으로 착취를 당하던 ‘선비’가 인천으로 와 방직공장에 입사를 하지만 공장 노동자 일도 끔찍하기는 몸종 일과 별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기계에 말려들어가 목숨을 잃는 일도 벌어지고 감독관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선비’는 이 끔직한 일을 견디어내면서 동료 ‘간난이’를 통해 노동자 조직화 일에 가담하고 이 땅의 노동현실에 대해 눈뜨게 되지만 결국 폐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죽고 맙니다. ‘선비’가 일하던 작업장은 이렇게 그려졌습니다.

 

일제시대 제사공장 여성 노동자의 모습
 

“기계를 소제하는 동안에도 기계의 운전은 쉬지 않았다. 그래서 선비는, 아니 이 공장 안의 여공들은, 이 기계란 쉴 줄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기계에 머리카락이나 혹은 옷이 끼일까 봐 무서워서 머리에 수건을 막 쓰고 검은 통옷을 만들어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시커멓게 내려 입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나 간봄에 여공 하나가 머리카락이 와꾸에 끼어서 마침내는 기계에 말려들어 무참하게도 죽었던 것이다.” - 강경애 [인간문제] 中 -
 
일제시대에 ‘선비’가 일했던 ‘동양방적’은 지금도 만석동에서 ‘동일방직’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동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노동자 조직화 활동이 탄압을 받던 그 공장에서 40여 년 뒤, 유신 독재 치하에서는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1978년에 회사 측에서 민주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대의원대회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뿌리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경찰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했습니다. 민주노조 운동을 지원하던 종교 단체 도시산업선교회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날조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민주노조를 파괴합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석정남’의 수기를 읽으면서 ‘강경애’가 그렸던 일제시대 동양방적보다 더 끔찍하다고 느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20년이나 지났는데 어쩌면 식민지시대 수탈보다 더 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1937년 동양방적 전경                                                      동일방직 현재 모습(경인일보)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 나라 노동운동의 역사를 이렇게 뒤틀리게 만들었구나, 비감(悲感)에 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경애’가 인천 만석동 동양방적에서 개척한 노동문학이 분단과 전쟁, 파시즘 정권에 의해 고사 지경까지 갔다가 바로 그곳 만석동에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부활합니다. 그러나 반쪽짜리 역사의 상흔은 아직도 우리 노동운동 발전의 질곡으로 남아있습니다. 계승해야 마땅할 위대한 노동문학의 태두 ‘강경애’의 삶은 아직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 암살에 관여했다는 낭설이 떠돌기도 하는 모양인데 작가가 간도 용정에서 민족혼을 지켜내기 위해 생을 바친 일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영화 [동주]를 통해 간도에서 민족혼을 지켜낸 분들의 위대한 삶을 다 함께 만나게 된 건 큰 감동이었습니다. 엄혹했던 식민지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저 먼 이국 땅 간도 용정에서, 민족정기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신 지사(志士)들을 뵙는 것만큼 감동적인 만남이 또 있을까요.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를 낳은 그 간도 용정, 그 때 그 시절에 ‘강경애’도 있었습니다. 재만 조선인 사이에서는 ‘윤동주’에 버금가는 민족시인으로 추앙되고 있는 ‘심연수’ 시인은 ‘강경애’ 남편 ‘장하일’의 용정 ‘동흥중학교’ 제자입니다. 이렇듯 이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합심하여 용정을 조선인 공동체로 일궈냈는데 분단은 이들을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심연수’ 시인을 잘 모르듯이 북한에서 나온 강경애 원작 영화 [소금]을 남한에서는 보기 힘듭니다. 분단의 질곡으로 우리 역사가 절름발이가 된 걸 또 확인하게 됩니다.
 
일제시대에 발아한 노동소설은 미처 자라기도 전에 동족상잔과 파시즘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다가 70년대 들어 척박한 땅에서 노동수기로 싹을 틔우게 됩니다. 80년대에 들어서는 노동소설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많은 뜻 있는 젊은이들이 현장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역력하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여든 분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세기말에는 다시 잠잠해지고 맙니다. 뿌옇게 흐린 날들이 한도 끝도 없다 싶을 즈음에 ‘소금꽃’이 피어났습니다. 유일한 여성 용접공 노동자, 장장 308일 동안 혼자 타워크레인 고공농성을 벌인 불굴의 투사, ‘김진숙’이 쓴 [소금꽃나무]는 21세기 노동운동을 다시 깨어나게 합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걸 작가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의 노동소설은 그렇게 처연하게 ‘소금꽃’으로 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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