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성포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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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포구로 가는 길
  • 양진채
  • 승인 2017.01.2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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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패루 위의 고래 / 양진채

▲ 유광식_북성포구(선상 파시)_2011


어쩔 수 없다. 며칠째 연재를 쓰기 위해 작품을 고르고 고민을 했지만 결국 내 소설 <패루 위의 고래>를 읽어보자고 내놓는다. 민망하기도 하고, 반칙인 줄도 아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에 기대어 꼭 하고 싶은 얘기, 이 얘기 아니면 안 되겠다 싶은 얘기가 있다. 인천과 관련지어 요즘 온통 내 머릿속을 채우는 한 곳이 있기 때문이다. 북성포구가 그곳이다.

이번 경우에는 작품이 먼저가 아니라 지명인 북성포구가 이 소설을 끌어왔다고 해야 하겠다. 북성포구 얘기를 하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적당한 소설을 찾기 어려웠다고 변명을 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북성포구는 지금 개발 논의로 한창 뜨겁다. 해양수산부가 북성포구를 7만 평 가량 매립하겠다는 안을 내놓으면서부터다. 북성포구 주변의 악취, 오폐수 등 환경개선이 절실하다는 주민 청원을 받아들여 매립 사업을 발표했다. 문제는 북성포구를 매립한다고 해서 주민의 숙원인 악취나 오폐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결국 주민의 숙원은 해결하지 못한 채 개발을 앞세워 우선 매립하고 보자는 계획이니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북성포구는 개항의 문물이 드나들던 주변이었다. 현덕의 소설 <남생이> 첫 줄에 나오는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에 나오는 호두형 포구가 있었던 곳이 바로 북성포구 주변이다. 그동안 우리 인천은 ‘매립의 역사’를 이어왔다. 갯벌 위에 빌딩과 아파트를 지어 인구 300만 경축포를 쏘아 올렸다. 그러는 사이, 항구 도시 인천은 점점 사라져 도심 근처에서 바닷물을 만져볼 수 있는 곳이 남지 않게 되었다.
인천은 작년부터 올해까지 역점 사업으로 인천 가지 재창조를 위해 인천의 역사 및 문화유산 분야, 인천의 자연환경 분야 등 인천만의 고유한 가치를 찾겠다고 하고 있지만 인천시 관계자부터도 북성포구의 역사는 물론, 북성포구가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실정이다.

나 역시 인천에 살고 있으면서 북성포구를 알게 된 것이 근 10년 안쪽이다. 인천에 이런 곳이 숨어 있었다니 경이로운 심정이었다. 그 경이로움은 포구를 찾아들어가는 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패루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인천)역 뒷길로 접어들었다. 녹슨 철길이 여러 갈래로 길게 엉켜 있었다. 억센 풀들이 그악스럽게 침목 사이로 뿌리를 뻗었다. 그 옆 고가 위로 드물게 차가 달렸다. 고가 아래로는 곡물이나 사료 포대를 실은 대형 화물트럭들이 수십 대 서 있었다. 녹색 방수 천막으로 짐을 덮어 놓은 차량 옆에 고딕체로 쓰인 ‘곡물수송’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비둘기들이 옥수수 알갱이가 떨어진 포도에 부리를 박았다. 비닐 천막 끝을 쪼기도 했다. 어디선가 구워구워 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화물 트럭들은 길 가득 정차되어 있었다. 왼쪽으로는 대부분 사료 공장들이었다. 밀가루 공장도 보였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날렸다. 공장 입구에는 하나같이 ‘방문객 경비실 경유’라는 팻말이 달려 있었다. (중략)
길이 좁아지고 낮은 슬레이트 집이 몇 채 보였다. 유리문의 색 바랜 선팅지에는 바지락칼국수니, 주꾸미 볶음이니 하는 메뉴가 간판 대신 붙어 있었다. 어두운 가게 한 귀퉁이에 포개 놓인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는 먼지가 소복했다. 골목 입구, 게와 새우 조개 등을 함지박에 담아 파는 곳에 몇 사람이 기웃거렸다. 바람이 불었고 바다 냄새가 났다. 그래도 포구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가게를 왼쪽에 끼고 울타리와 높은 담장이 쳐진 골목 안으로 하나둘 사라졌다. 그가 성큼 골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왼쪽은 공장 시설물을 막기 위한 마름모꼴 철망이, 오른쪽엔 회백색 담이 있었다. 둘이 걷기에도 좁은 골목이라 그가 앞서 걸었다. 두 차례 꺾어 들자 막다른 골목 끝에 난데없이 포구가 드러났다.
포구가 있긴 있었다. 작은 포구였다. 생선을 파는 열 평 남짓한 횟집이 여남은 개 늘어선 왼편과 달리 오른편은 바로 바다 곁이었다. 포구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작은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조금 더 쉽게 대한제분 공장 담벽을 따라 찾아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북성포구를 갈 때는 이왕이면 물때를 미리 확인하고 물이 가득 차는 만조시간에서 두세 시간 앞당겨 가면 북성포구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배가 들어온다! 누군가 외쳤다. 배가 들어오다니. 이제 겨우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어디로 배가 들어온단 말이지? 그런데 놀랍게도 왼편 끝에서 목선 앞머리가 보였다. 배는 흘러드는 물길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떠 있기도 어려울 것 같아 보이는 바닷물 길을 따라 배는 천천히 헤엄치듯 포구를 향해 다가왔다. 몇 척의 배가 뒤따라 들어왔다. 배를 따라 한 떼의 갈매기들이 포구 주변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배가 석축 앞으로 다가와 보폭 넓이의 널빤지를 석축에 갔다 댔다. 따로 배를 대는 시설이 있는 게 아니라 물이 끝나는 석축 앞에 배를 대고, 널빤지로 배와 석축 사이를 이었다. 사람들이 널빤지를 밟고 걸어가 배에 내려섰다. 물이 가득 찬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만 보았던 나는 개흙 사이의 좁은 골을 따라 배가 들어오는 광경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배가 들어오는 작은 물길을 골씨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중략)
포구로 들어온 배는 일곱 척이었다. 꽃게, 갑오징어, 병어, 젓갈용 멸치 등을 갑판 한가운데 펼쳐놓고 그 자리에서 팔았다. 그를 따라 흔들리는 널빤지를 밟고 올라섰다. 난데없이 나타난 포구이기는 했지만 골씨를 따라 배가 들어오는 광경, 싱싱한 생물을 배에서 바로 흥정해서 사는 모습 등을 구경하는 동안 못마땅한 마음이 사라졌다. 싱싱한 갑오징어나 꽃게, 낙지 등은 산 채로 함지박 안에 담겨 있었다. 배가 나란히 붙어 있어 건너다니며 구경 할 수도 있었다. 값도 그날 들어온 배와 사러 온 사람들의 수에 따라 결정되고, 배가 막 들어왔을 때와 시간이 지난 후의 값이 또 다르다고 했다. 이 배 저 배를 건너다니며 물건을 보고 값을 묻던 사람들이 하나둘 검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사들고 뱃전을 나섰다. 병어를 잔뜩 사던 아주머니가 50년 가까이 이 도시에 살았지만 여긴 처음 와본다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포구이긴 한 모양이었다. 문득 똥바다요? 하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동네의 바다가 똥바다로 불렸다는 걸 아는 사람 정도는 돼야 이 포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상 파시라고 배 위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해산물을 살 수 있는 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선상파시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다. 개인적으로는 북성포구의 냄새와 오폐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화시설을 만들고, 이 선상 파시를 적극적으로 살려내고 홍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북성포구를 살리고 개발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북성포구를 발견하고 그 뒤로 여러 번 북성포구를 찾았다. 일부러 물때를 확인하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생새우를, 꽃게를, 병어를 샀다. 운 좋게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북성포구의 노을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 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북성포구를 알고 있었고 찾고 있었다. 포구가 주는 떠남과 돌아옴의 여정, 비릿한 냄새, 염분이 묻어 있는 갯바람 등을 그 쓸쓸함으로 많은 사람을 달래주고 위로해주었다.

소설 속에서는 한때 치열하게 이 사회의 변혁을 꿈꿨으나 지금은 간 이식을 받고, 이 포구를 찾아든 선배와 그를 따라온 내가 있다. 그들에게 북성포구의 골씨를 따라 들어온 배, 그 배에서 난간에 옮겨진 고래는 청춘과 함께 그 시대가 지나갔으나, 그래도 누군가의 가슴에는 아직 살아 있는 그 무엇이지 않을까.


나는 배가 들어왔던 골씨, 아직 물이 빠지지 않아 그 길을 드러내지 않은 물길을 바라보았다. 석축 난간 위 안개에 둘러 싸여 있는 고래가 그물에 걸려 죽은 뒤 배에 실린 채 이 작은 골씨를 따라 들어 온 게 아니라 고래가 골씨를 따라 헤엄쳐 이름 없는 포구를 찾아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준설선이 매워지는 골씨의 개흙을 퍼내고 그 길을 따라 고래가 들어온다. 고래도 이 포구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쯤에서 ‘똥바다’ 암호를 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래가 그물에 걸려 북성포구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니라, 골씨를 따라 헤엄쳐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나는 얽힌 선로와 사료나 곡물을 실은 트럭 사이를 걸어 역으로 왔다. 그러고 보니 포구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역 근처에는 안개가 끼어 있지 않았다. 그의 머리에 하얗게 안개비가 얹혀 있었다. 포구를 다녀온 징표 같아 보였다. 물기를 털어주었다. 내 머리도 쓸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중략)
나는 우리가 찾아들던 골목이 어디쯤인지 가늠해보았다. 그 너머의 작은 포구와 그 포구 난간에서 안개비를 맞고 있을 고래도 떠올렸다. 바닷물이 들기 시작하면 골씨를 따라 힘겹게 헤엄쳐 오는 고래가 보일 것도 같았다.



울적한 심사가 될 때, 붉은 노을보다 더 짙은 울음을 삼키고 싶을 때, 지치고 힘들어 어딘가에 말없이 기대고 싶을 때, 북성포구는 쓸쓸하고 황량한 모습을 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골씨를 따라 배가 들어오듯 우리 마음속에 삶의 비의(悲意)를 되새기게 한다.


천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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