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오늘, 오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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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오늘, 오늘입니까?
  • 송수연
  • 승인 2017.09.05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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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영화읽기] (8) 엘리자의 내일

 ‘송수연의 영화 읽기’는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송수연 평론가의 협약하에 <인천in>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매월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 및 의미를 되새기며, 특히 영화와 아동청소년 문학의 접점을 독자와 함께 읽고자 합니다.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보자.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부정부패의 결정판이라 나는 이런 나라에서 딸을 키우고 싶지 않다. 어릴 때부터 과외를 시키고 갖은 정성을 기울인 끝에 딸은 드디어 영국 유수 대학의 입학을 앞두고 있다. 마지막 졸업시험만 무사히 치루면 되는데 시험 전날 딸이 납치를 당해 다치고 만다. 따 놓은 당상이라고 믿었던 졸업시험에 비상등이 켜진다. 이는 곧 딸의 영국행이 좌초될 수 있으며, 그간의 모든 노력이 공염불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 당신이라면 이제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위의 이야기는 영화 <엘리자의 내일>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 2016)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다. 저렇게 단순하게 요약하면 배부른 부르주아지의 한가한 고민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 로메오의 삶이나 그가 처한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젊은 시절 조국 루마니아의 개혁을 위해 싸웠던 로메오는 변하지 않는 현실에 지쳤고 환멸을 느낀다. 영화 곳곳에 배치된 다양한 컷과 씬이 보여주는 루마니아의 현재는 그야말로 부정부패의 종합선물 세트다. 영화에서 각종 부정부패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그러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는 로메오가 그런 현실의 일부가 되는 순간이다. 그가 섬세하게 기획한 딸 엘리자의 내일(미래)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부패의 고리 안으로 들어가고 그 자신이 부패의 일부가 된다.


얼핏 우리의 ‘386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이 장면들은 앎과 실천이 얼마나 다른 영역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아는 것은 행동하고 실천하기 위한 동기일 뿐, 앎 그 자체는 보기보다 훨씬 더 허약하다. 그러니까 “이곳을 떠나렴. 너를 위해서야.”라는 로메오의 말과 저 말을 현실화하기 위한 로메오의 행동은 사실 로메로가 딸을 통해 이루고 싶어 하는 그 자신의 좌절된 꿈인 셈인데, 로메오의 앎은 부메랑처럼 돌아온 과거(딸이 자신처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힘없이 무너진다.





이와 관련해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로메오 주변의 여성 인물 형상이다. 로메오의 아내와 그의 어머니는 영화 안에서 거의 죽어 있는 인물에 가깝다. 여기서 죽어있다는 말은 실제적이고도 상징적이다. 먼저, 그녀들은 실제 많이 아프거나(아내) 죽음을 앞두고(어머니)있다. 또 진실을 말하는 그녀들의 가늘고 낮은 목소리는 그들의 파트너인 행동하는 로메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로메오가 준비한 부정시험에 대해 딸이 스스로 결정하게 해달라는 아내의 요청은 쉽게 묵살되고 여기 남아서 변화를 만들어야지 다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냐며 손녀의 유학을 반대하는 어머니의 의견 역시 가벼이 도외시된다.


영화를 볼 때도, 보고 나서도 나는 궁금했다. 왜 감독은 그녀들을 그렇게 죽은 인물로 그려냈을까. 특히 로메오의 아내는 앎과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처음과 끝이 여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앎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다른 세상에 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남편의 말 앞에서 그녀는 어떻게 진출하느냐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공정하게 살아서 사서로 주저앉았느냐는 공격에 대해서도 원칙을 지키면 손해 본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은 그렇게 살았노라고 말한다. 그렇다. 원칙을 지키고 앎을 실천으로 옮기면 손해 보게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념을 지키다가 어떤 그럴싸한 장(場)에 진출하지 못하면 정말 저렇게까지 잿빛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영화 속 그녀들에게서 나는 최소한의 자부심이나 존엄, 긍지를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저 아Q의 정신승리 말고는 정말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일까?

 

리얼리즘에도 다양한 갈래와 분파가 있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현실을 모사하고 반영하는 리얼리즘과 현실 안에 이미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리얼리즘이 있다. <엘리자의 내일>은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리얼리즘에 더 가까워 보인다. 우리의 현실과 현실의 감춰진 이면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작품들도 의미가 있지만, 어둡고 답답한 현실 일수록 그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그렇지만 너무 작고 연약해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가능성의 얼굴을 발견해내는 예술이 소망스러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오늘을 사는 소망스러운 인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로메오는 과거의 실패에 사로잡혀 딸의 미래를 강박적으로 계획하는데 총력을 다 하고, 로메오의 아내 역시 온전하게 오늘을 사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결말에서 로메오에게 유학을 갈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엘리자의 말이나 여기에 대해 네 선택이니까-라고 화답하는 로메오의 대답은 어딘지 공허해 보였다. 정말 미래는 현재보다 중요한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난 달 칼럼의 대상이었던 영화 <아메리칸 허니>가 떠올랐다. <아메리칸 허니>는 오늘을(또는 오늘만) 치열하게 사는 청춘들의 이야기였다.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손안에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나는 과거에 붙잡혀 미래를 준비하느라 오늘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과연 오늘의 기쁨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누리고 있는가. 아마도 이건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영원한 질문과 숙제로 남을 수도 있겠다. 독자 여러분의 오늘은 오늘인지, 여러분의 오늘은 안녕한지, 안부를 묻고 싶다. 여러분의 오늘,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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