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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11·마지막편) 세 번째 살인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18-01-04 08:46ㅣ 송수연 (songsooy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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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수연의 영화 읽기’는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송수연 평론가의 협약하에 <인천in>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매월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 및 의미를 되새기며, 특히 영화와 아동청소년 문학의 접점을 독자와 함께 읽고자 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아무도 모른다>(2004)였다. 부모 없이, 돌봐주는 누구도 없이 아이들만 전기도 수도도 끊긴 작은 아파트에 남겨져 생활했는데 그런 사실을,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아무도 몰랐다는 실화를 뼈대로 만든 영화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떠나버린 엄마가 나쁘거나 남겨진 아이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영화는 가해자(어른) vs 피해자(아이)라는 손쉬운 이분법 대신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엄마의 말을 설득력 있게 담고, 복지관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아이들의 삶을 진지하게 따라간다. 누구도 쉽게 단죄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방식이, 그 시선이 충격적일만큼 새로웠다.

 

<세 번째 살인>(2017)은 ‘가족이야기’에 정통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처음으로 도전한 법정물이다. 영화는 미스미의 살해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미 한 번의 살인경력으로 30년형을 살고 나온 그는 스패너로 누군가의 뒤통수를 내리쳐 살해한 후, 시체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운다. 이 과정에 자주 클로즈업되는 미스미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없다. 게다가 잡힌 그는 자신의 살해를 순순히 인정한다. 미스미의 변호사 시게마루는 강도 살인을 단순 살인 및 절도로 바꿔 형량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것은 명확하다. 살인도, 이에 대한 검사의 공소도, 변호사의 대응 전략도. 그런데 전략 수립을 위해 시게마루가 미스미를 접견할 때마다 미스미는 살인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번복한다. 거기에 피해자의 딸 사에키가 등장하면서 사건은 점차 알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사에키가 열네 살 때부터 피해자인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미스미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시게마루는 ‘진실’이라는 기묘한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는 미스미가 사에키를 위해 단죄에 나섰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애쓴다. 애초에 “뭐가 진실인지는 어차피 알 수 없”으며 “이해와 공감 같은 것은 변호에 불필요”하다고 말한 시게마루로서는 엄청난 변화이다. 그러나 진실을 파헤치려는 시게마루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정작 미스미다. 사에키가 포함된 살인과 관련한 자신의 가설을 들려주고 진실의 여부를 묻는 시게마루에게 미스미는 말한다. “그것은 좋은 이야기로군요.” 예상될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미스미를 위해 증언을 하겠다는 사에키를 주저앉히는 것도 미스미다. 그는 재판의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은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부르짖는 미스미 앞에서 시게마루는 사에키의 증언을 막을 수 밖에 없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너무나 분명했던 사실들이 점차 섞이고 흐려지면서 영화는 무수한 질문을 남긴다. 정말 죄인은 누구인가? 원산지를 속여 물건을 팔고, 딸에게 몹쓸 짓을 하는 아버지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어머니인가? 아니면 이 상황을 종료시킨 미스미인가? 혹시 미스미가 정말 살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들은 영화의 제목을 묻게 한다. 30년 전의 살인이 첫 번째 살인이고, 지금이 두 번째 살인이라면 세 번째 살인은 뭘까?

 

30년 전 미스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은 사실을 후회한다는 시게마루의 아버지(그는 30년 전 미스미 사건의 판사였다)와, 미스미가 살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합의 하에(판사, 검사측, 변호인측. 여기에 당사자 미스미의 자리는 없다) 재판을 속개하는 시퀀스들은 “인간의지와 상관없이 생사가 결정된다”는 미스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가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사법체계는, 그리고 거기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은 죄인을 가려내고 그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명확하고 정당한 판단을 내리는가? 영화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정말 그러한 것인지를 반복해서 묻는다. 그렇다면 미스미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인 세 번째 살인의 주체는 (미스미 자신이기도 하지만)불완전한 사법체계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접견실의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미스미와 시게마루의 얼굴이 절묘하게 겹쳐지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여기서 미스미와 시게마루는 다른 듯 같아 보이고, 비슷해 보이지만 또 다르다. 진실도 그러한 것은 아닐까. 이것인가 하면 저것 같고 거기에 가보면 막상 또 그렇지 않다. 나의 진실은 나의 진실일 뿐, 모두의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무책임의 대명사로 그려지기 십상인 엄마를 마녀로 희생양 삼지 않은 것처럼, <세 번째 살인>에서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른 듯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미스미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의 진실은 그의 죽음과 함께 땅에 묻힐 것이며,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각자의 짐작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 확실한 것이 필연적으로 품기 마련인 폭력성을 늘 염두에 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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