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에 단골로 그렸던 하얀 원통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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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에 단골로 그렸던 하얀 원통 건물
  • 유동현
  • 승인 2018.08.13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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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인천기상대 -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 발자욱을 남긴 모교의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서 사진사 앞에서 졸업앨범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상 관측 ‘사상’ 최악의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상(史上)’은 언제부터 말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기상 관측을 시작한 것은 1904년 4월 10일 인천기상대(옛 인천 임시관측소)에서다.
일제는 이듬해 기상 관측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천 임시관측소를 헐어내고 응봉산 정상에 2천여㎡ 규모의 최신 시설을 갖춘 목조 2층짜리 인천관측소를 세웠다. 그 땅은 대한제국 황실 재산이었다.
 


<1959년도 제물포고 앨범. 눈 내린 후 제물포고와 기상대 전경>

 
설립 초기 일기예보는 낮에는 깃발, 밤에는 전등으로 전달됐다. 큰 삼각형 깃발을 이용해 동풍은 녹색, 서풍은 청색 등으로, 사각형 깃발로 맑음은 흰색, 비는 청색 등으로 예보됐다. 밤에는 깃발 대신 여러 가지 색깔의 큰 전등을 내걸어 날씨를 알렸다. 라디오를 통한 기상 방송은 1928년부터 시작됐다. 1931년부터는 해상 날씨를 알려주는 어업기상방송도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1958년 동산고 앨범. 곳곳에 철조망이 둘러쳐 있다.> 

<1964년도 대건고 앨범. 출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마당에서 촬영했다.>
 

북위 37.28˚ 동경 126.38˚ 응봉산 꼭대기에 등지 튼 인천기상대는 자유공원 사생(寫生)대회의 단골 스케치 포인트였다. 많은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높게 솟은 철탑과 원통형의 하얀 건물의 독특한 기상대를 도화지에 그려 넣었다.
그림으로는 친근했지만 결코 가깝지는 않았다. 도로에서 떨어져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고 육중한 철문으로 굳게 닫힌 이곳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1969년도 동인천고 앨범. 기상대 오르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별로 없다.>

<1957년도 인천고 앨범.>
 

응봉산 꼭대기에 솟은 기상대 건물은 인천 시내 어느 곳에서든지 눈에 들어 왔다. 많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들어가 볼 수 없는 기상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어쩌면 일부러 배경을 삼지 않았어도 자유공원에 서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느새 원통 건물은 사진의 배경으로 들어왔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은 건물 바로 앞 까지 접근해 사진을 찍었다.
 


<1970년도 인일여고 앨범. 운동장에서 어머니날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인천 시민들에게는 제물포고 쪽으로 향한 기상대 모습이 익숙하다. 기상대는 작은 봉우리를 품고 있다. 그 봉우리를 중심으로 제물포고 반대편에 인일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인일여고 운동장에서는 기상대의 다른 모습, 뒤태가 보인다.
 
 

<1960년도 제물포고 앨범>
 

이제 사생대회 아이들은 기상대의 하얀 원통 건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다. 그 유서 깊은 건물이 2012년에 사라졌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건물이었다.
기상대 측은 1960년대와 80년대에 증·개축했기 때문에 문화재 가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소리 소문도 없이 철거했다. 새로 지은 2층 건물이 놓인 기상대 봉우리의 실루엣이 영 어색하다. 이제 그 원통 건물은 ‘원통하게도’ 낡은 앨범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dhyou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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