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풍가서 막춤 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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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풍가서 막춤 추고 싶다
  • 유동현
  • 승인 2018.10.08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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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소풍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 발자욱을 남긴 모교의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서 사진사 앞에서 졸업앨범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소풍날이 왔다. 원족(遠足)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기분을 돌리거나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바깥에 나가 바람을 쐬는 일’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근대식 학교가 설립된 이후 ‘소풍’이란 말이 생기기 전 ‘원족’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원족이든 소풍이든 학창 시절에 가장 기억 남는 것은 일 년에 봄, 가을 두 번 갔던 소풍일 것이다.
 

버스 타고 가는 것은 언강생심. 웬만한 거리는 단체 행군이다. 실제로 70년대 들어서는 소풍도 일종의 교련(군사훈련)의 연장이었다. 소풍 복장은 교련복이었다.  

 

 
<1976년도 박문여고 앨범. 학교 문을 나서 순간부터 소풍길은 시작되었다.>

< 1966년도 인천고 앨범. 옆의 어른은 교사일까 악사일까.>


 

거의 모든 학교가 프로그램은 비슷했지만 소풍은 결코 ‘바깥에 나가 조용히 바람 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소풍지에 도착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선생님의 주의사항. 함부로 휴지 버리지 말고, 저 멀리 넘어가지 말고…. 귓바퀴에 도달하는 말은 하나도 없다. 흘려들은 후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까먹는다.(아주 간혹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그룹에서 ‘두꺼비’가 나타나곤 했다)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반별 장기 자랑. 이것 때문에 소풍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개인기’를 전체 학생들 앞에서 뽐낼 시간이 드디어 왔다.


 

<1973년도 영화여상 앨범. 선글라스 소품 하나로 ‘카수’ 필이 확.>



<1982년도 대건고 앨범. 설마 군가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 조용하고 수줍음 잘 타던 친구가 기타를 들고 나타났다.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를 불렀다. 그 순간 그는 교실에서 본 친구가 아니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앵콜이 터져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그 친구는 존덴버의 를 불러제꼈다.  그날 이후 그는 학교 ‘스타’가 되었다.  


 

<1968년도 인천공고 앨범.>

 

소풍은 선생님들에게도 ‘소풍’이었다. 오랜만에 칼칼한 백묵 냄새에서 벗어나 바람 쐬기 좋은 날이다. 각 반의 반장들이 싸 온 음식을 돗자리 깔고 한 상 크게 펼쳤다. 어느 반 반장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좋은 지 품평도 한다. 점심 식사 전에 학생들 가방을 수색해서 빼앗은 두꺼비는 선생님들의 ‘전리품’이다.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이 돌아간다. 이것도 이젠 추억이 되었다. ‘김영란법’ 때문에 선생님들도 각자 자신의 도시락을 싸 가야한다.      

 

 

<1969년도 동인천고 앨범. 송도유원지 무대를 장악한 현란한 궁뎅이 춤.>

<1966년도 인천무선고(재능고) 앨범. 함께 트위스트를 춥시다.>

 

 

노래로 시작한 장기 자랑은 후반부에 가면 여지없이 춤판이 되었다. 그들의 춤도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60년대 트위스트, 70년대 고고, 80년대는 디스코다. 이 모든 시대를 초월한 춤은 바로 ‘막춤’이다. 간혹 학생들의 무대에 선생님까지 뛰어들어 사제지간의 정을 돈독히 쌓기도 했다. 이 가을 ‘쫄 교복’ 입고 존 트레볼타 춤  한번 추고 싶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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