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그대로 좋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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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그대로 좋은 가을
  • 임병구
  • 승인 2018.10.1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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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화 - 임병구 / 인천예술고 교사
 


용인 인근 야산이었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사방에서 후두둑 밤톨들을 떨군다. 떨어진 밤 한 알을 들어 올려 한참을 들여다본다. 터무니없이 작디작다. 이 한 톨이 떨어지는 소리가 세상을 채웠구나. 하늘이 천둥소리를 내듯 밤 한 알은 자기 소리를 내며 가을 속으로 내려 와 삶을 완성한다. 벌레가 먹었거나 조금 일그러져 있거나 밤은 밤 나름으로 갈색 윤기로 반지르르하다. 낯선 내 손 안에서 한 세월 자신의 삶을 반짝거린다. 들여다볼수록 감탄스럽다. 떨어진 한 존재의 소리가 내 안에 무겁게 놓인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말씀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우주가 여기 들어 있구나.”

옥련동 아파트 뒤뜰에서 영근 대추를 만났다. 대추가 붉어 가면서 가을은 깊고 대추를 닮아 익어가는 사람이 있어 저절로 자신의 빛깔을 되돌아보게 된다. 자연스레 장석주 시인이 읊은 ‘대추 한 알’을 따라 흥얼거린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낱.”
하늘 한 번 올려다보면서 푸른빛을 지우며 붉어가는 내 삶에 지나 간 태풍과 천둥을 그린다. 그렇게 사람도 둥글어 지겠지만 둥근 만큼 쭈그러져야 단맛이 밴다. 내게 단맛이 있다면 시련과 세월이 켜켜이 쌓여 붉게 쭈그러진 덕이겠다.

이 가을은 풍요와 결실로 칭송받지만 풍요에는 과정이 스며있고 결실은 떨궈야 완성된다. 내 삶에 가을이 와 있는데 여러 장면들이 겹쳐진 화폭이다. 장면들을 꺼내 보니 가을 소풍이 봄 소풍과 달랐다. 어린 생각으로도 봄빛과 가을빛은 생기와 윤기로 구분되었다. 봄은 찬란했고 가을은 윤택했다. 소풍 나설 때 기분으로 치면 봄에는 들떴고 가을에는 흥겨웠다. 새 옷과 새 신발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면 꿈의 때깔이 달랐다.

국민학교 2,3학년 즈음 가을이었을 것이다. 내일은 추계소풍일, 당연히 옷과 신발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기대는 한껏 높은데 빨간 누나 신발을 신으라는 말씀이 떨어졌다. 얼굴부터 먼저 빨개졌다. 이 신발을 신고 친구들과 어른들 앞에 나선다는 건 소풍날이 아니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풍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그 가을 날, 빨간 신발을 끌고 나타난 남자 아이는 온 몸이 새빨갛게 붉어져 버렸다.

다른 소풍날. 소풍이라고 해봤자 조금 더 먼 동네 바닷가를 향해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많은 동네 분들과 걷는 길이었다. 당시 교감선생님은 평소에도 동네 어르신들과 술자리를 즐겼다. 술냄새가 많이 났지만 낮술과 밤술 구분이 없던 때라 늘 유쾌한 모습으로만 기억에 남는 분이다. 우리는 우리들끼리 평소에 입에 대지 못하던 음식을 나눴고 선생님들은 못 이기는 척 학부모님들이 주시는 술잔을 들이키셨다.

과하지 않을 수 없는 술자리가 오래 이어졌고 교실을 떠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기분에 취해있을 때 교감선생님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마도 동네 어머님들이 바람을 잡은 듯 박수와 노랫소리가 커졌고 교감선생님 등은 거북이등처럼 굽었다. 곱사춤이라는데 얼굴과 눈빛이 온통 붉어진 교감선생님 표정은 사지를 뒤틀면서 사뭇 고양되어 있었다. 춤은 비장했지만 어린 관객은 부끄러운 흥분으로 차올라 눈도 얼굴도 마음까지도 붉게 달아올랐다. (훗날 공옥진 선생님 공연을 보면서 이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원체험이었다.)

소풍이 아닌 가을날에도 들과 산을 뛰는 꿩사냥 보조역에 동원되기도 했는데, 그게 또 신기했다. 겨울 사냥은 눈 덮인 산에 올무를 놓거나 산을 뒤져 먹이를 찾아 헤매다 지친 꿩을 잡으므로 승산이 있었다. 드문드문 꿩을 포획한 장면을 구경하거나 꿩 육수를 맛보는 확률 있는 사역이었다. 가을에 산을 둘러싸고 소리치며 꿩을 쫓다보면 당시 생각으로도 이 짓을 왜 하나 싶었다. 꿩이 우리를 데리고 논다는 기분이 들었지 우리가 그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옅었다.

하지만 푸석푸석한 낙엽들을 밟으며 뛸 때 심장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는 가을 소리와 잘 어울렸다. 푸드덕 꿩이 차고 오르는 소리, 산을 둘러 싼 우리 무리가 함께 놀라며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 내 가슴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가을 산을 채운 기운과 만나 온 산이 왕왕 울렸다. 꿩을 잡지 못해도 좋았다. 가을 산 기운이 몸으로 들어와 심장이 뛰는 붉은 기운으로 산도 붉고 소년도 붉었다. 결과를 얻지 못해도 즐거울 수 있구나. 가을 산을 뛰어서 체험으로 얻은 진짜 소득이었다.

가을인지 봄인지 헷갈리는 소풍은 중학교 1학년 때 일어난 사건의 충격 탓이다. 연수구 청학풀장이 단골 소풍지였다는 생각은 또렷하다. 소풍 바로 전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지목해 노래를 시키셨다.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엉겁결에 칠판 앞에 나가서 부른 노래는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 때 꿈을/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낭랑한 고음이 교실에 울려 퍼졌고 박수가 터졌다. 졸지에 불렀어도 노랫가락과 가사가 주는 감흥에 겨워 내 눈가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더 볼 것 없이 학급대표가 되었다.

김밥과 사이다, 계란으로 무장한 소풍날 장기자랑 무대에 올랐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잘 나가다가 고음에 걸렸다. ‘빛나던 눈동자’에서 내 눈은 빛나기는 커녕 치켜 뜨고 또 뜨느라 새빨개졌다. 한 번의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목을 가다듬고 다시 얼굴을 그렸지만 내 얼굴만 목이 메도록 붉어졌다. 차라리 두 번으로 포기할 것을 이미 실성 상태에서 잡은 세 번째 첫 음도 높았다. 빛나던 눈동‘자’에서 콱 막혔다. 계란과 김밥을 꾸역꾸역 먹어 얼굴이 시뻘개질 때는 사이다라도 마셨다. 수백의 친구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얼굴을 그리’려다 제 얼굴에 먹홍빛을 들이고 말았다. 실제 봄 소풍이라고 해도 사방이 검붉은 빛으로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을, 가을 같았던 한 시절 사연이다.

장면마다 낯 뜨겁지만 포개놓고 떠올리면 얼굴과 눈이 동그래지면서 어딘가에 따뜻한 기운이 차오른다. 요사이 학생들과 청년 세대를 향해 실패를 격려하는 문구가 늘어나는 건 권장할 일이다. 마땅히 실패를 경험하도록 조장하면 할수록 교육은 교육다운 기운을 회복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실패가 더해지면 성공이 된다는 합산 공식은 성공에 목마른 이들에게 짠물을 던져주는 셈이다. 한동안 교실 앞에 유행했던 급훈,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단어’는 재미가 섞인 말인데도 위로가 아니라 겁박이 되었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일수는 있지만 실패를 거듭해서 낳은 성공만을 자식으로 삼을 수는 없다. 실패는 실패 자체를 완성체인 자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그게 더 현실에 가깝다.

가을은 와 있고 천지에 익어가는 존재들로 차 있다. 익은 다음에는 떨어지거나 털려 난다. 붙어 있는 게 성공이 아니라 오던 길에서 내려오는 이들이 가을을 채운다. 그래서 무엇이 되는 게 아니다. 그냥 가을이라서 떨어져도 푹신하다. 나도 실패해서 뭐가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다시 뛰어 내려 보고 싶다. 실패라고 해도, 그대로가 좋으니,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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