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의 삶이 밴 골목의 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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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삶이 밴 골목의 생태학
  • 최일화
  • 승인 2018.10.1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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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임경묵 시집 《체게바라 치킨집》 - 최일화 / 시인

 
하모니카를 불어 주세요
 
아버지가 툇마루에 한갓지게 앉아
하모니카를 붑니다
입술이 잘 미끄러지게 하모니카에 침을 쭈욱 바르면서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두 손으로 하모니카를 포옥 감싸고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풍잣 풍잣
리듬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풍자자 풍잣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풍잣 풍잣
 
아버지 태어난 곳은 연기군 남면 양화리 66번지
행정수도가 들어선다고
집도, 집터도, 뒷간도, 뒷간 옆 돼지우리도, 뒤란도, 정구지밭도, 장독
도, 장독대 옆 고욤나무도 다 사라지고
주소만 새로 얻어
세종시 연기면 세종리 66번지
옛날 옛적 강경의 새우젓 배가
부여에서 백마강과 반갑게 손잡고
공주로 거슬러오다가
장남 평야 끄트머리
앵청이나루와 만나던 곳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풍자자 풍잣
아버지, 내일 일찍 저하고 보청기 하러 대전에 가야하니까
오늘은 그만 주무셔요
 
툇마루 모서리에 하모니카를 탁탁 털고
가래 한 번 뱉고
두 눈 지그시 감고 다시 하모니카를 부는 아버지
 
풍잣풍잣
밤 깊은-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곳없는-나도 섰--다
풍자자 풍잣
 
아버지, 비 와요?

 
2008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임경묵 시인이 첫 시집을 냈다고 해서 곧바로 주문했다. 감동적인 시를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서 좋은 시 한 편을 만나면 그 시인의 이름이 금세 마음속에 새겨진다. 임경묵 시인도 그런 경우다. 일면식도 없지만 오직 지면에서 작품 한 편 만나 그 시인의 시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읽고 첫 작품집이 나오자마자 구해 읽은 것이다. 임시인의 시는 현대 서정시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확고하게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어 시의 모범이 된다. 시가 관념의 나열로 되어 있으면 얼른 싫증이 나는데 시 속에 이야기가 있으면 읽는 내내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 시인의 시는 따뜻하고 맛깔스럽게 의성어를 창안해 내는 솜씨 또한 일품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이렇게 따뜻하고 친구와도 같이 허물없고 즐거운 부자의 모습을 보여준 시를 참 오랜만에 읽는다.

엊그제 한 문학평론가의 강연을 듣다가 한국시의 계보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김소월, 윤동주, 이상, 백석, 정지용 등등의 시인을 논하면서 현대의 시인들이 가장 많이 그 계보를 잇고 있는 시인이 이상과 백석이라고 했다.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임경묵의 시를 읽으면서 어느 계보에 속할까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백석의 계보를 잇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계보를 잇는다고 해서 아류나 모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자기의 시 세계를 새로 구축하면서 선배시인들의 계보를 잇고 있는 시인들, 이를테면, 신경림, 장석남, 문태준 등등의 시인을 거론했다. 임경묵 시인은 이제 첫 시집을 낸 젊은 시인이다. 앞으로 어떻게 시세계를 펼쳐갈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매우 우수한 시인으로 많은 독자를 확보할 것이란 믿음을 갖게 한다. 시 한 편 더 읽어보자.


21세기 노래방
 
21세기에 너무 늦게 도착하고 말았네
노래방 여주인의 영업용 냉장고엔 캔맥주가 벌써 바닥났는데
21세기에 태어난 여주인의 아이들은
카운터 뒤편 쪽방서
우유에 탄 초코볼 시리얼을 먹고 있는데
막차가 끊긴 미산동 가구단지
다국적 노동자들이
21세기로,
21세기로 몰려들고 있었네
노래방 꽃무늬 벽지에 손바닥을 빨판처럼 붙이고 서서
변성기 아이 같은 목소리로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이것저것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21세기는 토요일 밤마다
방글라데시는 방글라데시끼리
스리랑카는 스리랑카끼리
캄보디아는 캄보디아끼리
필리핀은 필리핀끼리
탬버린 흔들며
할로겐 램프 필라멘트가 끊어져라 막춤을 추고 있었네
21세기에 태어난 여주인의 아이들은
노래방 칸칸에 설치된 여주인의 아이들은
노래방 칸칸에 설치된 CCTV화면을 보다가
깜박 잠이 들고
21세기가 만원이라
당분간 나는 21세기에 들어갈 수 없었네
21세기로 내려가는 주름진 지하 계단도
달빛에 서성이고 있었네
 
이 시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가구단지 내 골목에 있는 21세기 노래방에서 일어난 일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도 역시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관념적인 시를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실감이 나고 읽는 재미가 있다. 여기서 21세기는 물론 노래방의 이름이지만 21세기의 한 골목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21세기 노래방에 다국적 노동자들이 국적별로 찾아들어 한국가요 “잡초”를 부르는 광경이 21세기의 새로운 풍속도로 다가오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이경수는 해설에서 임경묵 시의 특징으로 “시 변두리 골목을 스케치하듯 그려냄으로서 골목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사연과 그들의 생태, 더 나아가 골목의 감정을 조형해낸다.”고 하였다.

다국적 노동자들의 모습과 노래방 여주인 아이들의 모습이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도 한 편의 시로서 감동으로 와 닿는 것은 사실성 속에 시적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진실이란 우리 서민들이 살아가는 21세기 골목 풍경에서 시대상을 잘 담아내고 그 묘사가 사실적이라는 데 있다. “방글라데시는 방글라데시끼리/스리랑카는 스리랑카끼리…”하는 대목은 우리가 흔히 보는 풍경이지만 간과하고 마는 것이 보통인데 어김없이 붙잡아 시로 만들어내는 재주, 그것이 바로 시적 재능이 아니겠는가. 가난한 여주인의 아이들이 카운터 뒤편 쪽방에서 초코볼 시리얼을 먹으며 노래방 칸칸의 CCTV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드는 광경은 골목 서민들의 가난한 풍경이다. 이 평범한 풍경 속에 서민들의 애환이 배어 있고 재개발이 예정된 골목의 따뜻한 세상살이가 얼비치기 때문에 시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최일화 시인)

*임경묵: 시인. 경기 안양에서 태어나 충남 천안에서 성장했다. 공주대학교 한문교육과와 한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하반기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시집 『체게바라 치킨집』(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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