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배다리 벽화골목이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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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배다리 벽화골목이 어디 있어요?"
  • 강영희
  • 승인 2019.01.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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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금창동 배다리 벽화이야기1

@송림동 8번지 철탑이 있던 마을의골목길에 그려진 벽화_2003



배다리 벽화골목(거리)이 어디 있어요?" 여름이든 겨울이든 방학이면 종종 카페나 사진관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 중에 하나다. "여기는 벽화거리나 골목이 따로 있지 않아요.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어요. 대략... " 하며 ‘철로변길’이나 ‘우각길’에 쉽게 볼 수 있는 벽화를 소개해주곤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해주고 나면 '벽화지도를 그려야하나?' 종종 고민을 했다. 급한 일도 아니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어서 곧 잊어버리곤 했었는데 새로운 건물이 하나 둘씩 지어지고 고쳐지면서 벽화도 하나 둘 씩 지워지고 사라져갔다.
 
지난 해 말 가장 좋아하는 벽화가 사라졌다. 1930년대 배다리 일대 풍경, 마을의 골목길 풍경, 창영초 아이들이 그린 창영초 타일벽화, 직접 배우고 공부하던 주민들이 그린 마을풍경 등 다양한 벽화들이 있던 창영학교 입구 벽화들이 그것이다.
 
창영학교 입구이자, 운동장 아래에는 동구 민방위교육장이 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민방위 교육을 위해 마련된 장소인데 구조변경을 하더니 어느 틈엔가 벽화가 가득한 외벽까지 싹 덮어버리고는 떡하니 군사시설표식이 그려졌다.
 
이 곳에 있었던 십 수 년 중에 가장 많은 변화를 격고 있는 한 해였는데 올해부터 2-3년 더 많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어 아직 남아있는 벽화들도 그 변화들 속에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배다리에 가장 많은 벽화를 그렸던 ‘퍼포먼스 반지하(이하 반지하)’와 적지 않은 작업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으로 그 벽화 이야기를 좀 정리해보려고 한다.

 


@1930 창영동 일대 작업 및 완성된 모습


금창동 일대의 많은 벽화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퍼포먼스 반지하>라는 예술활동가 그룹이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그린 것들이다. 벽화를 통해 색을 입혀가자 좋아보였고, 이것을 느낀 주민이나 기관의 태도도 바뀌었고, 다양한 벽화들이 마을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재개발과 도로를 반대하는 많은 문화예술활동가들이 배다리를 오가면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는데 그 활동 속에서 상가 셔터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주민이 직접 그린 벽화도 있다. 공공근로 어르신들이 그린 벽화도 있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색만 칠한 경우도 있는데 주변의 환경이 더해져 자연스럽게 그림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부분적인 표현만으로도 멋진 그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몇몇 곳은 그런 영향을 받아 다른 예술가들을 불러 그린 그림도 있다.

그렇게 그려진 것이 필자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대략 50곳이 넘는다.


 
@인하자원 그래피티 작업자와 완성된 벽화들


십 수 년 전에는 오래된 마을을 다 뒤집어엎는 재개발들이 많았는데 의도적으로 더럽고 지저분하게 만들어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행위들이 많았다. 고치고 가꾸기는 일을 부질없게 느끼도록 하는 일이었다. 쓰레기가 쌓이고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낡고 오래된 작은 마을에 ‘생기’를 더하는 방법으로 우린 색을 택했다.
 
우리는 벽화의 역사부터 공부했고, 벽화의 다양한 역할을 이해하며, 사회운동 및 민중미술로서의 멕시코 벽화운동에 영향을 받아 지역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치우고, 무너지는 벽을 보완하고,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는 공공적인 공간,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등하교길 만나는 공간을 중심으로 청소를 하고,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렸다. 벽화가 흉물이 되지 않게 하려고 적지 않은 고민을 하며 다양한 기법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며 진행했다.
 
기존의 벽을 최대한 단단히 하고, 그 위에 물감이 밀착되도록 하는 재료를 몇 번씩 바르고, 지역의 특성과 이야기를 담아 그림을 그리고, 다시 그림이 벗겨져나가지 않게 밀착시키는 몇 번의 과정을 더했다. 다른 곳의 벽화보다 꽤 오랜 시간 배다리 벽화가 선명하게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벽화에 필요한 공정을 빼놓지 않고 했을 뿐이다.
 
‘여기, 아직! 사람이 있다!’는 외침을 회색빛 마을에 그림을 채움으로서 마을공동체, 지역공동체, 운동으로서의 벽화운동으로 시작했다. 마을과 어울리는 벽화는 그렇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가장 늦게 그려진 '국제서림' 벽화는 건물주의 심경변화로 제일 먼저 지워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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