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 동네에 우뚝 솟은 골리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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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 동네에 우뚝 솟은 골리앗
  • 유동현
  • 승인 2019.01.13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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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전도관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의 발자국을 남긴 모교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1959년도 인천여상 앨범. 건립 초기 절반은 1층짜리였던 것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

1964년도 박문여고 앨범. 옛 박문여고 교정에서 보이는 전도관.

 
송도국제도시가 들어서기 전, 인천은 ‘저층’ 도시였다. 구월동 씨티은행 경인본부(옛 경기은행 본점)를 제외하곤 20층 넘는 빌딩이 없었다. 산(山) 외에는 눈앞을 가로막는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숭의동 109번지’ 동네에 있던 전도관(정확한 주소는 107번지)은 비록 2층짜리 건축물이었지만 인천 시민에게 ‘웅장한’ 건축물로 기억된다. 전도관은 한때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인천의 웬만한 곳에서 다 볼 수 있었다. 동인천, 주안, 개건너는 물론 앞바다 섬에서 인천 항구로 들어 올 때도 희미하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이 건물이었다.

 

1964년도 송도고 앨범. 전국체전 개최 이전의 모습으로 초가집들이 많이 보인다.

1965년도 동인천고 앨범. 옛 동인천고에서는 전도관이 빤히 보였다.

 
그곳의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맨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구한말 때의 알렌이다.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그는 1890년 이곳에 여름 별장을 지었다. 둥근 타워의 돔을 곁들인 2층짜리 별장이었다. 1907년 알렌은 미국으로 귀국했고 그 자리를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가 차지했다. 1927년에는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 남매가 그곳에 흔히들 개미학원이라고 불렀던 계명학원을 세웠다.

이후 ‘불의 사자’ ‘동방의 의인’이라 불린 박태선 장로가 이끈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지금은 천부교)가 ‘공사집’ ‘선교사 집’으로 불리던 작은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1957년 10월 전도관을 세웠다. 1978년 전도관은 이곳을 떠났다.

 

1973년도 영화여상 앨범. 운동장 가까이에 있는 큰 건물은 도원극장.

1975년도 인일여고 앨범. 2019년 현재의 동네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전도관 건물은 공설운동장 쪽에서 잘 보였다. 그 덕분에 졸업앨범에 그 모습이 배경으로 자주 담겨져 있다. 각종 체육대회 행사 사진을 찍었는데 전도관의 풍채가 그대로 렌즈 안으로 들어왔다. 당시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었지만 학생들이 전도관의 정문이나 담장 혹은 그 건물 가까이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여러모로 접근하기 꺼려지고 다가가기 쉽지 않은 종교 단체였다.

1964년을 기점으로 전도관 주변이 일대 쇄신한다. 제45회 전국체전이 그해 9월 3일부터 8일까지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됐다. 본부석에서 빤히 보이는 전도관 동네는 초가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모조리 바뀌었다. 이후 인천에서 치러진 전국체전 때마다 동네 풍경이 계속 변모했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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