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아닌, 여성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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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아닌, 여성 노동자
  • 박교연
  • 승인 2019.02.26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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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썼을 때, 그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그에게 인간의 도덕은 주어진 조건(subject to)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개인의 이기심이 모이면 사회전체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었고,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개인의 이익 추구가 극단적으로 팽창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는 달리, 250년 동안 경쟁 시장은 여성의 돌봄 노동을 기반으로 하여 그 크기를 불려왔다. 낸시 폴브레는 그의 저서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 “여성은 그동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기회를 박탈당했고, 스스로를 주체적 존재로도 인식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건 가부장적 문화가 만든 여성의 무한한 이타성 때문이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여성이 자신에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끔찍하며, 앞으로도 기존 노동환경에 순응하여 “인류가 존속하는 데에 필요한 꼭 필요한 가치를 지탱”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타주의의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타주의의 딜레마에서 언제나 착한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보다 빨리 시장경제에서 도태된다. 더욱이 돌봄 노동처럼 표준화·객관화되기 어렵고, 계약의무가 없어 보상을 요구하기 힘든 노동일수록 이러한 노동을 전담하는 것(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남성은 결코 여성에게만 이타심을 강요해선 안 된다. 돌봄 노동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므로, 그걸 수행하는 주체 역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되어야 한다.

돌봄 노동은 공동체 나아가 사회, 국가유지에 필수적이지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일방적 돌봄 노동을 거부한 순간, 돌봄 노동은 ‘사회적 비용’으로 가시화되어 그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시장경제체제에 편입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적 압력 속에서 돌봄 서비스 종사자에 대한 처우와 돌봄 노동의 질은 점점 더 열악해진다. 왜냐하면 시장경제에선 여성의 희생이야말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방편이기에, 이들의 처우를 악화시켜 다시 돌봄 노동을 여성에게 이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도 이러한 담합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복지가 세금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노동없이 대가를 바라는 무임승차를 만들기 때문에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지는 시장경제 실패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면 여성은 전통적 가치에 완전히 귀속될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남성들은 아직까지도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며 여성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한다. “나에게 권위를 주면 당신을 돌봐줄 것이다. 하지만 내 권위를 뺏으면 너와 나는 혼자 힘으로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복지제도 없이 여성이 보수적 남성에게서 자립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다. 기본적인 교육, 최저시급이 보장되는 안정된 일자리가 없다면 여성의 생존은 오로지 결혼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복지는 노력 대 보상으로 제공돼야 한다. 결과 대 보상이 아니라. 국민 한명 한명이 자신의 경제적 환경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울리히 벡이 말한 것처럼 “위험사회(risk society)는 불확실성을 그 특징”으로 하기에, 복지국가는 ‘개인적 합리성’이 아니라 ‘거시적 합리성’에 의거하여 위험사회의 불확실성에 놓인 개인을 돌봐야한다. 사실 이러한 복지국가에 대한 담론은, 남성시민을 위해 17C부터 존 로크가 주장한 경제원칙을 여성에게까지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존 로크는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자기 노동의 산물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아 열심히 일할 동기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 말은 복지정책을 통해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경제적) 환경을 통제하고, 노동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보장받아야한다는 것과 같다.
요즘 복지의 부재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면,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지위와 노동환경이 많이 개선됐다고 보기 힘들다. 더욱이 복지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신자유주의만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문제는 미국보다 더 심각하다. 미국은 다국적 기업이 시장경제를 잠식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땅콩 리턴 사건’에서 보이듯 노동자를 경시하는 재벌이 모든 경제를 좌지우지한다.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더 한 ‘기업국가(Corporatocracy)’이다. 최근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글로벌화, 전지구화는 돌봄 노동의 재평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계단위로 벌어지는 노동력 이주와 자본이동의 유연함은 경쟁의 강도를 높여, 기업이나 국가뿐만 아니라 개별 구매자인 부모에게까지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게 만든다. 이에 낸시 폴브레는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이윤 극대화방식을 전부 불법화해서 무한경쟁체제를 막아야한다고 하지만, 대량생산-대량소비가 가장 중요한 세계 경제체제에서 이러한 공정함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돌봄을 사회화한다는 건 참 어렵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여성의 돌봄 노동을 보상하지 못했다. 시장사회주의, 참여민주주의 등의 대안적 제도들과 돌봄 노동을 결합하면 돌봄 노동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겠지만, 치열한 경쟁중심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카트리네 마르살은 그의 저서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서 5살 어린아이와 경제운영자를 비교했다. “돈을 나눠 가질 때, 5세 어린이들은 돈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는 전혀 관심 없고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 싶어 했다. 가질 수 있는 액수가 적은 경우에도 아예 못 받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일단 쥐고 봤다. 경제적 인간처럼 말이다. 그러나 세계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5세 아이들이 아니다. 아니면 실은 5세 아이들인가?”

이 의문에서 보다시피 여성이 한 명의 노동자로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한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역할을 기꺼이 그만둘 필요가 있다. 기업은 5살 어린아이처럼 여성의 친절, 웃음, 청소, 정리 등 모든 유용한 노동을 헐값에 이용하려한다. 가정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제는 사랑이라는 무형적인 가치에 기대어 손쉽게 돌봄 노동을 여성의 일로 전가시킨다. 공동체 구성원이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돌봄 노동은 적절한 보상 없이 잡일로 취급되어 보상 없이 노동자의 에너지와 자원을 고갈시킨다. 따라서 이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리요구가 필요하다. 대가 없는 노동을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말이다.

애덤스미스는 경제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절반의 답만을 찾았다. 그는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그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인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그와 마찬가지로 생각한 사람들 때문에 여성노동자에 대한 권리는 2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약하기만 하다. 어머니가 아닌 그저 한 명의 노동자로 살기 위하여 여성노동권 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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