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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삶이란 여정에서 만나는 인연

(32)『그린 북 Green Book』

19-03-29 08:12ㅣ 한인경 (miso100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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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경의 씨네공간>은 2016년부터 ‘그해 주목 받은’ 또는 ‘다시 주목하는’ 영화들을 선정하여 평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달부터 미추홀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한인경 작가와의 협약 하에 <인천in>에 리뷰합니다.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나눕니다.

 
삶이란 여정에서 만나는 인연
 
『그린 북 Green Book』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부수기

개 봉 : 2019.01.09(130분/미국)
감 독 : 피터 패럴리
출 연 :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 린다 카델리니
장 르 : 드라마
등 급 : 12세 관람가

 

출처:영화『그린 북』
 

어쩌면 뻔한 줄거리가 아닐까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넥타이를 맨 흑인은 뒷좌석에서 양팔을 여유롭게 걸치고 있고, 듬직한 체격의 백인이 핸들을 잡고 있는 포스터 한 장이 단번에 시선을 끈다. 『그린 북』은 포스터에서 느껴지듯이 흑백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물론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낯설지 않은 주제를 어떻게 풀어 갔는가에서 이 영화를 보는 재미가 솔솔 무르익는다. 최고의 코미디 영화 ‘덤 앤 더머’(1993, 2014)를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린 북』은 ‘덤 앤 더머’를 만든 피터 패럴리(1956) 감독의 작품이다. 역시『그린 북』에서도 묵직한 주제,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주제를 코미디적인 분위기도 넣어 가면서 명쾌하고 신박하게 풀어갔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유가족들의 이견으로 구설수가 있긴 했다. 우정, 가족애, 인종 차별, 성 소수자, 反이민 정책. 익숙한 주제였음에도『그린 북』의 후기는 뜨겁고 행복하다.
 
영화화할 수 있는 거리가 많은 주제이다 보니 역시 비슷한 주제로 기발표 된 작품들도 많다. 필자의 판단으로 십 년 내에 제작된 잘 만들어진 영화 몇 편을 소개한다. 흑백 인종 차별을 다룬 영화로 헬프(2011), 히든 피겨스(2017)를, 성 소수자를 다룬 영화로는 캐롤(2015), 꿈의 제인(조현훈 감독, 2017)을, 미국에서의 가난한 불법 이민자들의 애환을 다룬 이민자(2011)를 추천한다.
 
『그린 북』은 상복이 두둑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제76회 골든 글로브 작품상(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조연상, 각본상 수상, 제43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관객상 등 세계 47개 영화제, 30개 부문에서의 수상, 가장 최근 올해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각본상, 남우조연상(마허샬라 알리)까지 거머쥐며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마허샬라 알리는 남우주연상을 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허샬라 알리는 문 라이트(2017)로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는데 이번 영화로 그의 할리우드에서의 입지와 캐스팅 순위는 고속 상승 중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처:영화『그린 북』
 

이 영화에는
1962년 뉴욕, 세계적인 뮤지션 ‘돈 셜리’(마허셜라 알리)와, 이탈리아계 이민자이면서 대화보다는 주먹부터 앞서곤 했던 클럽 관리인 ‘떠버리’,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가 투 탑으로 등장한다. 토니가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운전기사 겸 보디 가드로 채용이 되면서 돈 셜리는 인종 차별이 유독 심한 남부로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고 피아노 콘서트 투어를 떠난다. 이들의 여정에서 흑백의 두 남자는 옥신각신, 좌충우돌하면서 인생 벗으로서 우정을 쌓아간다.
 
진지한 표정과 말투, 돈 셜리는 세팅되지 않은 식탁에서의 식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반면, 토니의 거의 몸에 배다시피 한 비속어 사용, 말끝을 흐리는 습관, 거친 식사 태도 등 그의 가벼워 보이는 언행이 돈 셜리에겐 거슬린다. 그럼에도 돈 셜리는 감정을 조절하면서 직진을 피하고 우회하며 토니에게 일러주곤 한다. 돈 셜리가 프라이드 치킨을 먹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는데, 토니가 손으로 치킨 한 덩어리를 넙죽 집어서 거침없이 뒷자리의 돈 셜리에게 먹어보라고 권한다. 돈 셜리는 지금껏 먹어 본 적 없다는 프라이드 치킨을, 꿈에도 생각 못 했을 상황인, 포크 없이 간신히 손가락으로 잡은 채 먹는다.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 있다. 쇼팽 곡부터 재즈곡까지 마허셜라 알리가 들려주는 선율을 듣다 보면 스크린 속의 관객은 물론이고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음악회에 앉아 있는 착각을 주는 듯했다. 여기서 그가 흑인이란 점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영화에서 들었던 곡들은 온라인상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유색인에 대한 차별.
토니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막 직장에서 쫓겨난 실직 가장이었고 당연히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주변에선 이탈리아계 이민자라서 흑인의 운전기사를 한다는 비아냥을 퍼붓지만, 그가 돈 셜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후한 봉급 때문이었다.

토니는 돈 셜리와 함께 다니면서 그가 목격한 돈 셜리에게 가해지는 불합리한 차별에 인간으로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된다. 백인들 앞에서 돈 셜리는 수준 높은 연주를 하지만, 연주가 끝난 후의 대접은 변함없이 이방인 흑인일 뿐이다. 연주 후 식사하고자 식탁에 앉으려 하자, 백인 지배인은 흑인은 백인들과 같은 자리에서 식사는 할 수 없다며 오랜 규칙이라며 양해를 구한다. 어이없는 그들의 태도에 토니는 주먹을 날리려 하나 돈 셜리의 만류로 주먹을 내려놓는다.

 

출처:영화『그린 북』

 
돈 셜리는 흑인이면서도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한다. 남부 투어 중 땡볕 아래서 거칠게 쟁기질하며 노동을 하는 흑인들과 마주치면서 그들이 보내는 낯선 시선이 불편하기만 하다. 잠깐이지만 동성애자로서의 돈 셜리의 모습도 보여 준다. 돈 셜리는 흑인이지만 흑백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신세를 탄식한다.
 
다음으로, 『그린 북』은 버디 무비로 두 남자의 빛나는 케미스트리를 보여준다.
특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남부로의 투어가 깊어질수록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위로를 받고 위로를 주면서 인생 친구로서 가까워진다. 약속된 연주 투어를 마친 날이 마침 성탄절이다. 가족이 없는 셜리는 고가의 가구, 장식품으로 채워진 그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토니의 집에서는 토니 아내와 이웃들이 소박하지만 푸짐한 성탄을 준비하고 있다. 교양과 기품을 지닌 돈 셜리, 혼자 달을 보며 와인을 음미하고 했던 돈 셜리는 토니의 집을 노크한다.
 
 
더하여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 후손이 없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가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를 동경하는 테세우스는 힘이 장사다. 테세우스는 아버지인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를 찾아 나선 길에서 악당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악당들이 나그네들에게 했던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처치한다. 마지막 길에 다마스테스라는 강도를 만난다. 그는 나그네들에게 돈을 빼앗고 난 후, 침대에 눕혀서 나그네의 키가 침대 길이보다 키가 짧으면 나그네를 잡아 늘여 죽이고, 키가 침대를 벗어나면 벗어난 머리와 다리를 베어 죽이곤 하는 잔인한 악당이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잡아 늘이는 자’란 뜻이라고 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테세우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죽게 된다. 여기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이 편견, 차별, 오만, 아집, 융통성 없는 사람 등으로 해석되면서 삶의 곳곳에서 쓰이게 된다.
 
생선, 채소, 과일 등 각각의 진열대 위의 모습들은 자로 잰 듯 똑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 각각의 역할은 모두 소중하고 필요하다. 사과는 사과대로, 참외는 참외대로 각각의 쓰임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다 하여 버려지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 세상에서 외모의 다름으로 차별받지 않음에 누가 이의를 제기하는가? 자연스럽게 다르지만 그래서 조화로운,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그려 본다.
 


출처:영화『그린 북』
 

‘흑인 전용’ 여행안내서 ‘그린 북 The Negro Motorist Green Book’,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 듯하다. 『그린 북』은 흑인들이 여행하면서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식당, 주유소 등에 대한 안내 책자이다. 현재의 시각에서 실소를 금치 못한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안타깝게도 인종 갈등을 비롯한 ‘다름’으로 인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삶의 곳곳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은밀하게 그들끼리 즐기고 나누고 다른 것은 배척하고, 때때로 이용도 하면서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독선을 말이다.
 
굴욕을 참으며 남부로, 남부로의 피아노 연주 투어를 끝낸 돈 셜리의 용기와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세상은 불안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돈 셜리는 그가 구축한 예술가로서의 영역에서는 성공했으나 그간 주변을 가꾸는 일에는 서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사람과의 관계란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아서 ‘타샤 튜더’의 정원이 될 수도 있지만, 잡초가 생기기도 쉽고 그 잡초가 꽃밭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토니 발레롱가와 돈 셜리, 두 사람은 그 후에도 계속 우정을 유지했다고 한다.
 
 
추신:
주인공 두 사람을 보면서 새삼 느낀다.
돈 셜리가 그의 버디, 토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결국엔 연주회를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날처럼 같은 모습으로 돈 셜리에겐 여전히 쓸쓸한 성탄절이었을 것이다. 삶이란 여정에서 우연한 기회에 완성된 우정, 참으로 멋진 떨림이다.
 
한인경/시인, 인천in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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