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한센병 환자 구제사업 앞장 선 시인 한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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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한센병 환자 구제사업 앞장 선 시인 한하운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9.10.15 02: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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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한센병환자들로 부터 추앙 받아
 





보리 피리 / 한하운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시인 한하운선생 본명은 태영이다. 함경남도 함주 출신. 종규의 아들이다.1932년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 19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 가 1939년동경 세이케이고등학교 2년을 수료하였다. 그 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나병)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 그 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자신의 투병 생활과 함께 1950년성혜원, 1952년신명보육원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무하문화사라는 출판사도 경영한 바 있다.
 
그의 창작 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 활동은, 1949년 이병철의 소개로 『신천지』 4월호에 「전라도길」 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1955년에는 제2시집 『보리피리』를, 1956년에는 『한하운시 전집』을 펴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시해설집 『황톳길』(1960), 『정본 한하운시집』(1966) 등이 있다.
 
한센병은 감염성 질환이며, 예전엔 나병 또는 문둥병으로 불렸고 천형 병으로 여겼다. 그 시절 열악한 주거 환경 때문이었으나 그땐 그렇게 앓는 분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다행히 지금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으로 알려져 있고 환자도 보이지 않는다.
 
시인 한하운(1920~1975), 함경남도 갑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7세 때 한센병 확정 진단을 받고 삶이 급전직하 추락, 깡통을 들고 문전걸식하는 문둥이가 되고 말았다.
 
지나가 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웠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 마는// 아, 꽃과 같던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추녀 밑에 서서 우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삶> 전문 한하운의 시는 그 모진 삶의 증언이며 몸부림이다.
 
1950년 이후 부평에 정착해 인천과 인연을 맺었고, 활발한 시 창작과 함께 국립부평성계원 자치회장, 신명보육원 원장 등 한센병 환자 복지에 힘썼다.
 
해방 후 그는 원산에서 동두천까지 한 달 동안 천 리 길을 걸어서 월남했다. "불빛이 보이는 집을 향하여 미친 사람처럼 그대로 걷는다. 아, 원산에서부터 38선을 넘어 남한 땅을 한 달 남짓 죽음과 싸우며 탈출했다. 아무 생각도 없다.
 
그저 나의 자유를 찾아 끝까지 굳세게 싸워 목적을 달성했다는 기쁨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다." "밭에서 일하는 젊은 농부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농부가 경기도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동두천 땅이라고 한다. 그에게 음식점을 물었더니 그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주막집을 가리킨다."-<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또 후기에서 "이 책은 병과 시혼의 방황 속에 애달프고 서글픈 생존과 자유를 찾는 고고한 생명의 서이다. 앞으로도 자유를 찾은 나의 기록을 또 발표하겠다.
 
이 ‘고고한 생명’은 나의 인생 기록의 상권에 해당한다"라고 말했다.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우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돌아가실 때/ 날 두고 가는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어머니> 전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가정이란 빛이 없다.
 
어두움에 잠긴 폐허와도 같다. 한 번이라도 자식 된 도리를 못 해본 불효자식의 어머니에 대한 애상이 이 시가 되고, 어머니의 영혼을 붙잡고 호곡하며 요람의 느낌에 흐느껴 우는 것이다. 나로서는 우는 것밖에 할 일이 없지 않은가.
 
어머니는 영영 땅속에 묻혀 말할 길도 없다. 그리고 이북 땅이라 성묘할 길도 막혔다 지금 어머니께서 다시 살아나신다면 나는 어느 하늘 아래라도 찾아갈 것이다."
 
김신정 교수(인천대)는 "자신의 고통을 객관화함으로써 해방과 전후 사회의 시대적 고통을 환기한다"며 "그의 시는 인간다움을 찾는 근원적 질문"이라고 말했다.
 
생전에 「보리피리」 등의 시집과 「황토길-자작시 해설」,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 등을 남겼다. 인천문화재단은 이와 같이 살다 간 고인을 기려 2010년 「한하운전집(문학과지성사)」을 간행했다. 내년 2020년은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자, 서거 45주기가 된다.참고로 전남 소록도(한센병 환자촌)에서는 위 선생의 시비를 건설했다고 한다.
 
위와같은 훌륭한 한하운 선생 유택이 김포 장릉공원묘지에 방치수준으로 관리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위와같이 훌륭한 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하루빨리 '한하운 선생 문학관' 건립을 추진했으면 한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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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2020-12-16 16:45:37
이리농업학교가 현재 전북대학교익산캠퍼스로 변모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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