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이 주인공인 공동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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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주인공인 공동체"를 위해
  • 이미루 기자
  • 승인 2016.02.05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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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산업선교회 김도진 목사를 만나다

화도진 공원을 따라 걷다가, 조그만 골목을 타고 걸어 들어가면 오래된 살구색 건물이 하나 나온다.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일꾼교회는 1961년 미국인 조지오글(George E. Ogle, 한국명 오명걸) 목사가 건립한 인천 산업선교회이다. 조그만 초가집으로 시작해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지금의 일꾼교회가 되기 까지 이곳은 인천 노동운동은 물론 주민운동, 민주화 운동의 '원천'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인천 산업선교회는 현재 일꾼교회, 사회복지 선교회 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이미루 기자

그 곳에서 인천 산업선교회 8대 총무이자 '작은자 야학' 교장인 김도진 목사를 만났다. 그는 인천 산업선교회가 기록하고 있고, 가지고 있는 역사성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지역주민들과 '사람 냄새 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지금도 하루 하루 열심히 뛰고 있는 평범하고, 가까운 이웃이었다. 


노동운동에서 주민운동으로, 사회가 변하니 소외계층도 변해 


- 인천 산업선교회가 1961년 '노동목회'로 처음 시작 했는데, 지금까지 많은 활동을 해 오신 듯 하다. 인천 산업선교회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달라

인천 산업선교회는 당시 급격한 산업화가 이루어 지면서 산업화의 당사자이면서도 억압받고, 고통 받았던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한 활동을 많이 전개했다.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당시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소그룹 활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해고자협회(해협)은 이 건물 옥상에 모여 텐트치고 다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가 독재정권 시절이지 않았나. 그러다보니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탄압도 심했다. 이 전 총무님들 중에는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하고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던 분들이 계셨다.

내가 97년도부터 함께하게 됐는데 당시 IMF사태가 터지면서 하루하루 끼니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 이웃들을 보며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사실 그 때부터는 노동운동이나 기타 다른 운동들 보다는 산업화로부터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게 되더라. 주민운동이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고민이 본격화된 계기 이기도 하다. 


- 이 자리를 55년 째 지키고 있는데, 그 자체로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인천 산업선교회에서 보관중인 자료들. 수 많은 자료들이 분류되어 저장되어 있었다.  © 이미루 기자

건물과 장소가 가지는 역사성이 있다고 본다. 게다가 산업선교회 초창기 자료들부터 시작해서 당시 실무자들이 실무자로 일 하기 전에 노동현장을 경험했었는데 당시 현장 보고서며, 조지오글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지역에 대해 만들었던 보고 자료들, 산업 선교회의 방향성에 대해 제시했던 보고자료들 등 실무자료들 뿐 아니라, 당시 노동자들의 소그룹이나 문화서클 관련 자료들, 또 80년대 일꾼 역사교실 이라는 것을 진행했는데 이러한 자료들까지 상당부분 세세하게 남아있다. 

이런 자료들을 기반으로 이 곳에 역사기념관을 만들고 싶었는데, 일전에 화수동 일대 재개발 논의가 진행되고 하면서 장소 문제로 고민이 많았었다. 현재는 부동산 경기가 워낙 어려워져서 인지 재개발 사업이 오랫동안 추진이 안되고 있어서 역사 기념관 건립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다시 키워나가고 있다. 

 

작자미상의 80년대 통일운동 당시 그림을 꺼내 보여주는 김도진 목사  © 이미루 기자

 
단순히 자료를 전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장소 자체가 일종의 '노조간부 순례지' 혹은 '역사 방문 코스' 같은 게 돼도 꽤 의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기사들을 보면 당시 인천 산업선교회에서 교육을 받거나 조직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새로운 노조를 만들거나 기존의 노조 위원장이 되어서 민주노조를 만든다거나 하는 사례들이 워낙 많았으니까. 

장소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상징적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새로운 노조 집행부들이 노조의 의미에 대해 한 번 씩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만나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념관이 박물관처럼 스쳐가는 공간이 아니라 지역의 사랑방, 그리고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었음 좋겠다는 희망도 가지고 있다. 그런의미에선 노동운동도 주민운동도 그 본질적인 의미에선 같은 맥락이 아닐까한다. 


주민과 함께 만들어 가는 '마을 공동체'
 

인터뷰 중, 김도진 목사 © 이미루 기자


- 최근엔 주민운동을 주로 한다고 했는데, 어떤 사업을 주로 하는지

요즘은 푸드뱅크와 푸드마켓 사업에 주로 전념하고 있다. 푸드뱅크의 경우 기업이나 학교 등에서 발생하는 "잉여음식"(구내식당 등에서 음식을 정해진 인원 수 보다 여유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을 점심때 쯤 받아서 저녁때 지역주민들과 나눈다. 큰 식당이 아니더라도 동네 빵집, 떡 집 등 지역 상인들은 물론 지역내 기업들이 후원을 해 줘서 유지가 되고 있다. 

푸드마켓도 비슷한 개념인데, 쌀이나 음식 부재료, 라면 이런 것들을 지역의 기업들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지원을 해 주기도 한다. 이 경우엔 각종 물품이나 생필품 등을 후원받게 되는데, 이런 것들도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드리는 사업이라고 보면 된다. 

- 주민운동을 진행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사실 우리 교회에 낙인이 찍혀 있었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 오래전부터 안기부의 탄압도 받았고, 언론에서 빨갱이 교회라는 등 낙인을 찍어놔서 주민들이 꺼려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주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그런 낙인도 옅어 진 것 같다. 요즘은 주민들도 편히 받아 주시는 것 같다. 

요즘 힘든건, 주민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음식 나르기도 해야하고 준비할 일도 많아서 손이 많이 필요한데, 대부분 맞벌이 부부가 많고, 학생들도 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학원을 다닌다거나 하다보니 봉사자 찾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대부분의 푸드뱅크 일정이 주중에 있다보니, 정작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정부에서 지원하는 수준에는 한계가 있다보니 그 중에서도 '복지사각지대'가 생긴다. 차상위계층이라던가, 정부지원하는 사업에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 예를 들어 연탄지원 사업을 하는데 석유 보일러를 사용하는 가정이라면 난방비 지원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나고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산업선교회 옥상에는 자료실 뿐 아니라 성체를 만드는 장소도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체를 팔아 이익이 남으면 그 돈을 지역복지 사업에 사용한다고 한다 © 이미루 기자


- 출석 성도의 과반수 이상이 장애인이란 말도 들었는데 

사실이다. 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고 계신다. 그분들 대부분이 이미 청년기 너무나도 힘들었던 시절을 겪어서 인지 함께 하는 것에 더 적극적인 분들이 많다. 사실 80년대 목회일을 시작하면서 주로 장애인 자활을 돕는 일을 많이 했다. 

그 덕분에 인천 산업선교회로 오면서도 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특히나, 예전엔 장애인 고용이 기업에 의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취업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들이 최소한 중,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어도 취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작은자 야학 활동을 시작했고, 그 활동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작은자 야학의 교장자리까지 겸임하고 있다. 

당시엔 장애인이 사회 일원으로서 살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기도 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장애인들이 시설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시작한 활동이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공동체', '마을', '함께'. 


김도진 목사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공동체', '마을', '함께' 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그리고 그의 화두는 언제나 함께하는 '사람'에 있었다. 산업화 과정에서도 그 이후에도 소외된 사람들과 억압당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더 많이 머무르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공간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는 조지 오글 목사가 당시 노동운동에 앞장서고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었던 것 처럼, 교회가 사회문제에 앞장서서 전문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이야기도 전했다. 

지역과 그 지역 주민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이면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던 김도진 목사는 '공동체가 회복되고, 이웃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사회 안전망의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단순히 마을을 스쳐지나는 관광객을 유치하는 사업들이 아닌 진정으로 그 마을을 마을답게 만들 수 있는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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