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사진을 '까망하양' 사진으로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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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사진을 '까망하양' 사진으로 바꾸다
  • 최종규
  • 승인 2011.10.06 0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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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김동현·민경원, 《서대문 형무소》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든, 어느 집 하나를 사진으로 찍든, 어느 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사진을 내놓습니다. 어느 집 하나를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 느낌을 사진에 싣습니다.

 다만, 기계를 바꾼대서 사진 느낌이 확 바뀌지는 않습니다. 쓰는 기계가 달라지면 아주 조그마한 대목에서 느낌이 얼핏 바뀌기는 하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사람을 바라보거나 같은 사람이 같은 집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는 느낌은 거의 똑같습니다.

 기계는 그대로이고 사람이 다르다면, 이때에는 언제나 다른 사진이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다 다른 어버이한테서 태어나 다 다른 삶을 꾸렸거든요.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사랑을 받으며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린 사람이기 때문에, 이 다 다른 사람들이 일굴 사진에는 다 다른 사진말이 깃듭니다.

 기계가 그대로요 바라보는 사람 또한 그대로라 할 때에는, 쓰는 필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무지개필름을 쓸 때랑 까망하양필름을 쓸 때랑 사진이 달라집니다. 아니, 사진기를 쥔 사람이 사진기에 눈을 박아 들여다볼 때에는 똑같아요. 다만, 필름에 앉히는 모습이 달라지고, 나중에 종이에 사진을 얹을 때에 새삼스럽게 달라진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한 가지 더. 기계가 같고 바라보는 사람 또한 같으며 필름 또한 같다 할 때에는, 날씨와 날과 철에 따라 달라집니다. 봄철 찍는 사진하고 겨울철 찍는 사진이 같을 수 없습니다. 궂은 날과 갠 날 사진이 같을 수 없습니다. 아침과 새벽과 낮과 밤 사진이 같을 수 없어요.

 사진은 늘 사진이지만, 사진에 이야기를 싣는 사람입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으로 이루면서, 사진에 삶을 담는 사람입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 어떠한 기계를 썼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읽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어떠한 기계를 썼느냐를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웠느냐를 살필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쟁이는 이제껏 살아낸 내 나날을 돌이키면서 내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사진읽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오거나 어디어디 배움길을 다녀왔다 하는 가방끈을 알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읽기를 할 사람들은 사진 한 장에 깃든 이야기가 내 마음밭에 어느 만큼 아로새겨지는가를 느낄 뿐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기계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 사진에 담기는 사람이나 집이 어떠한가를 돌아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지개필름을 쓰겠느냐 까망하양필름을 쓰겠느냐를 가눕니다. 요사이는 디지털파일로도 무지개파일을 쓰겠느냐 까망하양파일을 쓰겠느냐를 가눕니다.

 내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이나 집을 ‘아침에 만나’려는지 ‘낮에 만나’려는지 ‘새벽에 만나’려는지 ‘한낮에 만나’려는지 ‘저녁에 만나’려는지 ‘밤에 만나’려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내 사진으로 옮기려는 사람이나 집을 ‘맑은 날에 사귀’려는지 ‘궂은 날에 사귀’려는지 ‘비오는 날에 사귀’는지 ‘눈오는 날에 사귀’려는지 ‘구름 낀 날에 사귀’려는지 ‘안개 낀 날에 사귀’려는지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 사귀’려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사진으로 빚으려는 사람이나 집을 ‘따순 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꽃샘추위 닥친 봄철에 어우러’지려는지 ‘갓 접어든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한창 무더운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벼락과 우레가 떨어지는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산들바람 가을철에 어우러’지려는지 ‘열매가 무르익는 가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겨울비 내리는 겨울날에 어우러’지려는지 ‘큰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철에 어우러’지려는지 ‘꽁꽁 얼어붙은 겨울철에 어우러’지려는지 ‘따스한 바람이 부는 겨울날에 어우러’지려는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열화당,1988/2008)를 읽습니다. 스무 해를 사이에 두고 첫판과 고침판으로 나누어진 두 가지 사진책을 읽습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988년 사진책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사진책입니다. 두 사진책은 서로 다른 책입니다.

 왜냐하면, 판짜임과 엮음새가 다를 뿐 아니라, ‘사진마저 다릅’니다.

 처음에는 “한정된 시간 내에 굴절 많은 우리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기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우리의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988/사진 찍은 이).”고 밝혔습니다. 그러면, 스무 해 뒤에는 ‘한정된 시간’이 아니었겠지요. 스무 해에 걸쳐 꾸준히 더 찍고 더 만나며 더 어우러졌으면, 2008년에 새로 내는 1988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못 다 이룬 숱한 이야기를 알알이 아로새길 아름다운 사진책이 될 수 있겠지요.

 나중에는 “판형을 확대하고 기록적 가치가 뛰어난 사진과 도면 자료 등을 추가했으며, 독립지사 세 분의 글을 덧붙여 서대문형무소에 관해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2008/편집자).”고 하지만, 2008년 사진책은 그리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2008년 사진책은 판이 조금 커지고 사진 짜임이 조금 달라지며 쪽수가 조금 늘었습니다. 그렇지만, 1988년 사진책하고 무엇이 다른가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럴 바라면 1988년 사진책을 똑같이 다시 낼 때하고 무엇이 나아질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1988년 사진책과 2008년 사진책은 큰 대목에서 서로 엇갈립니다. 1988년 사진책에는 ‘무지개사진’이 제법 실립니다. 2008년 사진책에는 오직 ‘까망하양사진’이 실립니다. 1988년 사진책에는 ‘무지개사진’이었는데 2008년 사진책에서는 몽땅 ‘까망하양사진’으로 바뀝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온누리 사진쟁이 가운데 ‘무지개사진’으로 찍는 이야기하고 ‘까망하양사진’으로 찍는 이야기가 똑같다고 느낄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까망하양사진이 나쁘고 무지개사진이 좋을 수 없습니다. 까망하양사진이 ‘기록 값어치가 빼어나며 다큐멘터리 빛깔이 더 짙을’ 수 없습니다. 두 갈래 사진은 두 갈래대로 이야기가 다르고 삶이 다르며 생각이 다릅니다. 그저 빛느낌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1988년 사진책부터 ‘사진쟁이는 무지개사진으로 담았’으나 ‘출판사 편집자가 까망하양사진으로 바꾸’었는지 모릅니다. 1988년 사진책과 2008년 사진책에서는 이 대목을 한 마디로도 다루거나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반드시 밝혀야 하고 꼭 다루어야 해요.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당신 사진을 ‘까망하양사진’이 아닌 ‘무지개사진’으로 찍었다고 할 때에, 이이 사진을 똑같이 바라볼 수 있을까요.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 안 풍경》은 까망하양사진일 때하고 무지개사진일 때에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사진으로 담긴 모습뿐 아니라 사진으로 찍는 느낌까지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무지개사진과 까망하양사진이 어떻게 다른 줄 모른다면, 새벽에 안개가 드리울 때에 소나무를 찍는 사진하고 한낮에 안개가 모두 걷혀 파란 빛깔 하늘이 눈부실 때에 소나무를 찍는 사진이 어떻게 다른 줄 모르는 삶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는 이 나라 사진밭이 어떠한 깊이요 너비인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 서대문 형무소 (김동현·민경원 사진,리영희·나명순 글,열화당 펴냄,1988.1.15·2008.1.1./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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