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한 조각으로 즐거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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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한 조각으로 즐거운 사랑
  • 최종규
  • 승인 2011.09.07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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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시외버스 책읽기


ㄱ. 시외버스 책읽기

 고속도로 둘레로 온통 풀빛 수풀과 논밭이 펼쳐집니다. 고속도로를 옆에 끼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동차 소리를 얼마나 어떻게 느껴야 할까 궁금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은 고속도로 둘레 사람들이 자동차 소리를 어떻게 얼마나 느끼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멈추고 땅에 발을 디뎌야 비로소 이 소리를 깨닫습니다.

 한여름 무더위이든 끔찍하도록 안 그치는 막비이든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에어컨 찬바람으로 가득한 시외버스에서는 하나같이 잠들거나 손전화질이거나 주전부리질이거나 수다질입니다. 나는 잠든 아이를 허벅지에 눕힌 채 커다란 배낭에서 책 한 권 꺼내어 읽습니다. 마실을 떠나면서 책 한 권 옳게 읽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잠든 틈에 몇 줄이라도 읽고픈 마음에 무거운 배낭에 무거운 짐이 될 책 한 권을 챙겼습니다.

 시외버스를 탄 고등학생과 대학생치고 책을 읽는 이를 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시외버스를 탄 어버이랑 아이치고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나기 대단히 힘듭니다. 시외버스를 탄 할머니랑 할아버지, 아주머니랑 아저씨들 가운데 책을 읽는 사람이란 거의 없다뿐 아니라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여느 때부터 책을 읽는다는 사람이 드뭅니다. 가게를 지키면서 쉬는 결에 책을 읽는다든지, 손님이 없는 동안 조용히 책을 펼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전철이나 기차에서 책을 읽는 사람도 썩 드물지만, 시외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더욱더 드뭅니다.

ㄴ. 서울과 책읽기

 서울에서 살아가려면 아주 바빠야 하고, 몹시 바빠야 하며, 언제나 바빠야 하니까, 책을 읽을 수 없는지 몰라요. 책을 읽을 수 없으니, 사람을 읽을 수 없고, 사랑을 읽을 수 없으며, 삶 또한 읽을 수 없을 테지요. 사람과 사랑과 삶을 읽으려 하지 않으니까, 바쁜 나머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랑과 삶을 읽으려 한다면, 바쁜 틈을 쪼개어 책을 읽거나 바쁜 일을 젖혀 놓고 책을 읽겠지요. 아니, 사람과 사랑과 삶을 아끼려 할 때에는, 바쁜 나날이 아닌 넉넉하면서 따사로운 나날이 되도록 온힘을 기울이겠지요.


ㄷ. 햇살 책읽기

 해가 났다가 구름이 가득하고, 빗줄기가 퍼부었다가 어느새 그치는 날씨.

 가끔 이러한 날씨를 맞이한다면 그러려니 하면서 여우비라느니 범이 장가를 가느니 하고 생각합니다. 날씨가 구지레한 채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되면, 도무지 사람이 살아갈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공장은 더 늘고 자동차는 끝없이 늘며 아파트는 자꾸 늡니다.

 엉망진창이 되는 날씨를 한 사람 힘으로 돌이킬 수 있을까요. 착하며 고운 날씨로 돌이킬 수 있을까요. 엉망진창으로 흐르는 정치나 사회나 문화나 교육을 한 사람 힘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맑으며 아리따운 모습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비가 멎고 구름이 걷혀 해가 나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후끈후끈한 기운이 서렸기에 섣불리 빨래를 내걸지 못합니다. 십 분 이십 분 지난 다음 빨래를 내겁니다. 조금 더 지난 뒤, 곰팡이가 피는 사진틀을 잘 닦아 해바라기를 시킵니다. 조금 더 지난 다음, 나무로 된 평상을 뒤집어 말립니다. 조금 더 지나고 나서, 이불을 빨랫줄에 차곡차곡 넙니다.

 다문 한 시간이라도 이 따사로운 햇살을 맞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따사로운 햇살은 기저귀 한 장에도 내려앉고 손닦개 석 점에도 내려앉습니다. 빨래를 잔뜩 했건 조금 했건 다르지 않습니다. 햇살은 모든 빨래에 골고루 내려앉습니다. 햇살은 텃밭에건 무논에건 멧자락에건 들판에건 골고루 내려앉습니다. 어느 쪽에는 더 내려앉고 어느 쪽에는 덜 내려앉지 않습니다. 땅이 기울었어도 골고루 내려앉습니다.

 목덜미로 땀이 흐릅니다. 빨래를 너는 동안에도 목덜미로 땀이 흐릅니다. 보송보송해지면서 햇살 냄새 듬뿍 받아들인 이불을 걷어 터는 동안에는 등줄기로 땀이 흐릅니다. 햇살은 빨래와 이불뿐 아니라, 빨래랑 이불을 널고 걷는 사람 등짝과 얼굴과 손등과 허벅지에도 내려앉습니다.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 햇살이면서, 누구를 딱히 더 좋아하지 않는 햇살입니다. 아니, 미움과 좋아함을 넘어, 고운 품으로 따사로이 부둥켜안는 너른 햇살입니다.

 내가 책을 왜 가까이했는가 생각합니다. 내가 책을 왜 이렇게 갈무리하면서 살아가는가 헤아립니다. 모든 책이 햇살처럼 너르면서 고운 따순 품은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햇살처럼 너르면서 곱고 따순 책이 있습니다. 백 권 가운데 하나이든 만 권 가운데 하나이든, 내 마음밭을 너르면서 곱고 따순 헷살로 스며든 책이 있습니다. 백 권이나 만 권이 아니라 한 권을 믿으면서 책을 만났고, 사귀었으며, 함께 살아갑니다.

 모두를 바치는 사랑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모두를 누리는 사랑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햇살 한 조각으로 즐거운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햇살 한 조각을 누리거나 나누면서 웃거나 우는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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