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글에서 호르헤 신부의 잘못된 신념에 대한 집착이 어떤 불행을 초래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든, 일에 대해서든, 신념이나 믿음에 대해서든 집착은 이렇게도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남에게도, 그리고 세상 모두에도 큰 상처와 재앙을 남기고야 사라집니다. 만약 너와 내가 하나라고 여길 수만 있다면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남’이라고 여기니까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이도환 선생이 쓴 《마음을 가꾸어 주는 작은 이야기》에 나오는 옛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립니다.
말을 잘 다루는 소문난 사람이 있었다. 그에 관한 소문을 들은 왕자가 말 다루는 법을 배우려고 그를 불렀다.
“예, 왕자님, 제가 지닌 모든 기술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왕자가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배우자 자신감을 얻은 왕자는 그에게 시합하자고 청한다. 그러나 패하고 말았다. 화가 난 왕자는 말했다.
“그대는 내게 모든 기술을 가르쳐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직 중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은 게 분명해. 내가 이렇게 계속 패하는 게 그 증거이지 않은가?”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기술적인 것은 다 가르쳐드렸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그렇다면 내가 계속 패배하는 이유가 뭐냐?”“말을 잘 다루려면, 왕자님 몸 아래에 말이 없는 듯 자연스럽게 달려야 합니다. 즉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자님은 경주할 때마다 저를 너무 의식합니다. 제가 앞에 있으면 따라잡으려는 마음에, 제가 뒤에 있으면 선두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에 집착합니다. 그러니 어찌 말과 하나가 되어 달릴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구두가 발에 잘 맞으면 구두를 신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걸어 다닙니다. 그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본연의 일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자는 말 타는 것에 몰입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몰입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즐기지 못했고, 그래서 패배한 것이지요.
이렇게 ‘너’를 이기고야 말겠다는 집착은 말을 타는 원래의 본질을 잊게 만들어버립니다. 돈이 왜 필요한지도 모르고 돈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랑을 좇는 것, 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사람들 역시 왕자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집착의 끝은 결국 패배이고 불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