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체로 과거, 즉 과거에 경험한 것이나 배운 것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준이 형성되고, 그 기준을 지금 일어나는 일이나 사람들에게 적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준’이란 과거의 유산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기준대로만 오늘을 살아간다면 오늘이 아닌 과거의 삶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게 되어 결국에는 성장이 머문 채 퇴보하고 말겠지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불편하기 짝이 없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불편함이 싫고 위험할 수도 있을 거라는 불안감 때문에 배움을 포기한다면 성장은 거기서 멈춰버릴 겁니다.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조명연,정병덕)에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승객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륙횡단을 하던 여객기가 기관 고장과 연료 부족으로 사막에 불시착했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다. 하나둘 밖으로 나오고, 조종사가 구조요청을 보내려고 무전기를 두드리지만 아무런 회신도 없다. 가지고 있던 식량과 음료수를 아껴 먹으며 구조를 기다렸다. 그리고 비행기 잔해를 기점으로 여러 명씩 조를 짜서 혹시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마을을 찾아보기로 했다. 조별로 근처를 돌아 다녀보다가 어둑해질 무렵이 되면 비행기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식량과 물이 바닥났다. 물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날 가망은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사막을 여러 방향으로 뒤지고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여러분,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결국 우리 모두 죽을 겁니다. 우리는 매일 밤마다 비행기로 돌아오곤 하는데, 우리가 살려면 이 비행기를 없애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조난지점으로 돌아와선 안 됩니다. 이게 마지막 기회입니다. 여기서 떠나 다행히 인가를 발견하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 이대로 있다간 모두 죽음뿐입니다.”
다음날, 비행기는 불에 타오른다. 힘껏 손을 맞잡은 사람들은 서너 명씩 헤어져 길을 떠난다. 이제 그들이 돌아올 곳은 없다.
며칠 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사막을 헤매고 다니다가 드디어 오아시스가 있는 마을을 발견했다. 기쁨에 찬 사람들은 주민이 주는 물로 목을 축이며 말한다.
“그의 말이 옳았다. 과거를 잇고 있는 줄을 과감히 끊어버릴 때라야 비로소 새로운 삶의 지평이 보인다는 그의 말이.”
성인 남성들은 으레 군대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의 사업이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자랑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실연당한 사람은 사랑했던 시절을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과거에 묶여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들이 과거를 말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지금’이 없습니다. 과거에 묶여 있는 한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옛친구들을 만나 과거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이고 필요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과거’란 몸은 ‘오늘’에 있지만, 마음은 ‘과거’에 머물러 모든 것을 ‘과거’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해석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순간만을 살며 나이를 먹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과거라는 족쇄가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으면 안 될 겁니다.
매일 되돌아오곤 했던 비행기를 버렸을 때 비로소 오아시스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잘 나갔든 얼마나 비참했든 상관없이 지금 내가 있는 이 사람과 이 일에 열중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라는 ‘과거의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늘의 나를 묶고 있는 과거의 끈을 잘라내야 비로소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비록 오아시스로 가는 여정이 힘들고 위험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 지금 만나고 있는 당신, 그리고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을 기꺼이 마주하며 웃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오아시스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