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이귀복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 - 유사랑 / 시사만평가, 자유기고가
바다에 운명을 건 인생
“인민군이 쏜 포탄이 강화 산이포의 우리 집으로 날아들었어요. 누나는 즉사하고 모친은 다리가 부러졌죠. 집이 완파되고 당시 4살이던 저도 포탄파편이 5곳을 관통했는데 겨우 살아났어요. 아직도 그때 흉터가 몸 곳곳에 남아 있죠. 당시 하시키(화물목선)를 운행하시던 부친도 미군에게 징발당해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강화 앞바다에서 배에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미군들과 함께 미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아슬아슬하게 생명을 건지기도 하셨죠. 6.25때 이야기라 해도 그런 끔찍한 기억을 간직한 강화도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차로 강화대교만 건너도 벌써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입이 벙긋 벌어지곤 해요. 고향이란 그런 건가 봐요.”
한평생을 선장으로, 도선사로 바다와 항구에서 보낸 이귀복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제고10회, 77세)은 배를 업으로 부리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애초부터 그의 바다 인생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부친은 인천에서 강화 군산 목포 등지로 쌀과 각종 물건들을 실어 나르던 화물목선, 하시키의 선주이자 선장이었다. 고향 ‘산이포(지금의 양사면 철산리)’는 분단 이전까지만 해도 많은 선박들이 드나들던 해상교통의 요지로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박완서의 자전소설 ‘엄마의 말뚝’의 배경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은 인삼이나 뽕나무를 재배하던 강화도의 다른 집들처럼 별로 옹색하지 않게 지냈어요. 강화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인천으로 나와 ‘인천사범병설중학교’로 진학했죠. 사범병설중학교는 당시 숭의동 인천교대 자리에 있던 학교인데, 사범병설중학교와 사범학교(고등학교)를 마치게 되면, 전쟁 후 교사수가 태부족이던 시절이라, 즉시 초등교사로 임용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인천교육대학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사범학교(고등학교)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물포고등학교로 방향을 틀어 입학시험을 치르게 된 거죠. 당시 제고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명문 학교로, 저희 중학교에서도 저를 포함해 겨우 9명만 합격할 수 있었어요. 입학 후에도 워낙 머리 좋은 아이들이 많아, 학업성적을 상위로 유지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죠. 제물포고등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감독 시험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는데도, 누구 하나 자기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일이 없었어요.”
고2 때, 큰 변고가 생겼다. 부친께서 운항 중이던 배가 쌀 8백 가마를 싣고 인천 앞바다에서 좌초된 것이다. 겨우 몸만 살아오신 부친께서 그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가산을 모두 잃어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언제까지고 태산처럼 든든하리라 믿었던 부친의 파산은 이 회장에게 정신적 충격과 함께 장래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학교가 끝나고 늦은 시간 자유공원에 올라 보면, 멀리 팔미도 안쪽으로 상선들이 여러 척 정박해 있고 그 상선들 사이를 부선과 끌배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저물도록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신기하게도 답답하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인천항 갑문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전의 일이다.
“우리 때는 제고 졸업하면, 이과는 서울대 공대나 의대로 진학하고 문과는 서울법대, 적어도 연대나 고대 정도는 가야 하는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기울어진 가정 형편상, 저한테는 학비 무료에 의식주까지 국가에서 모두 부담해주는 ‘해양대학’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어요. 자유공원에서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오래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죠. 사실 어려서부터 배와 바다는 제 놀이터처럼 정서적으로 친숙했고,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이라, 맘껏 세계를 돌아다녀 보고 싶은 소망도 한편으론 있었거든요.”
그렇게 부산해양대학 24기로 입학했다. 재학시절에는 한국선적의 대형선박이 거의 없던 때라, 졸업해도 배를 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졸업 무렵 한국해운산업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걱정은 기우가 되었다. 마지막 1년간은 일본선적의 상선을 타고 실습을 나갔다. 실습생한테도 넉넉한 수당이 지급되었고, 정박한 나라들에서 만나게 되는 문화충격이 상당했다.
항해사로 세계의 바다를 누비다
1971년 당시 일본은 파친코(슬롯머신)와 볼링장이 유행이었고, 동네마다 스포츠센터가 있어서 수영이나 스케이트 같은 운동을 누구나 즐길 수 있었다. 미국의 포틀랜드에서는 잘 정비된 주택들, 울창한 숲과 나무들을 통해 미국의 거대함을 실감했다. 스키드로 공원을 점유한 노숙자들을 보고는, 미국의 화려함 뒤편에 가려진 자본주의의 짙은 그늘도 느꼈다.
병역은 재학시절 NROTC(해군학군사관후보생) 교육을 받고, 방학 때 2달간 진해에 입소해 해군 해병대훈련을 거쳐, 졸업과 함께 해군소위 임관식과 퇴임식을 동시에 진행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전역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해운산업 활황으로 부족한 선원수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대책의 일환이었다. 1972년 해양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국내 최대 해운회사 가운데 하나인 범양상선에 입사했다. 그리고 처음 항해사로 외항선에 승선하게 되면서, 몇 년 뒤 선장이 되고 세계 바다를 구석구석 누비며 23년을 보냈다.
“빌딩 20~30층 크기에 달하는 수만 톤급 선박을 조종해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종종 예기치 않은 사고와 만나게 돼요. 한번은 태풍을 피하려고 급히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의 수로로 들어갔다가 10m가 넘는 파도에 휩쓸려 그 큰 배가 공중으로 붕 치솟았다가 까마득히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라고요. 사방이 온통 집채만 한 파도가 담을 쌓아 깊은 물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이 들었거든요. 모두 새파랗게 질려 선장 얼굴만 쳐다보는데, 선장인 제가 겁먹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요? ‘걱정마라, 이까짓 거 끄떡없다’라고 계속 선원들을 독려할 수밖에 없었죠. 희한한 건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아찔한 상황에서도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으면 뱃멀미조차 나질 않는다는 거예요. 23년 제 외항선원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본 정말 무시무시한 풍랑이었어요. 또 한 번은 포틀랜드에 정박했을 땐데, 선원들이 밤을 잔뜩 주워 온 거예요. 함께 맛있게 삶아 먹었죠. 그런데 나중에 배에 놀러 온 교포가 보더니 ‘여기서는 이걸 사람이 먹는 게 아니고 말먹이로 준다’며 배꼽을 잡더라고요. 다시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밤하고는 다른 종류란 걸 깨닫고는 좀 머쓱한 기분이 들었죠. 또 이건 제가 항해사였을 때 일인데, 영국 밀포드 하벤항에서 유조선에 오일을 싣고 이항하는 과정에서 선박을 회전시키다가 선미부분으로 캣워크를 쳐버린 사고가 있었어요. 물론 그쪽 도선사가 승선하여 선장과 함께 도선 중에 일어난 사고였죠. 캣워크는 유조선항구의 바다 위에 가설된 작업용 다리인데, 그게 왕창 부서져 공중으로 날아갈 정도로 충격이 컸어요. 다행히 인사사고는 없었고, 배도 멀쩡했지만, 이런 선박사고는 오래 머릿속에 남아 트라우마가 되기도 해요. 배를 내린지가 언제인데, 요즘도 종종 꿈속에서 좁은 수로를 빠르게 운행하다 배가 뒤집히는 꿈을 꾸곤 한다니까요. 항해사나 선장 중에는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끝내 배를 못타고 육상근무로 바꾸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죠. 스페인 빌바오에 정박했을 때는, 본사에서 고생했다며 2,000불을 회식비로 줬어요. 입항허가를 대행하는 선박대리점 직원이 추천해준 유명한 스페인 씨푸드 전문식당에 들어가 5명이서 최고로 맛있다는 바닷가재 코스요리를 실컷 시켜 먹었죠. 근데 1인당 50불이면 충분할 거라는 선박대리점 직원의 말과는 달리, 1인당 400불씩이나 나오는 바람에 그날 저녁 한 끼로 2,000불이 바닥 나버린 거예요. 당시는 환율 차이가 커 한화로 따지면 만만치 않은 거액이었거든요. 뉴올리언스에서도 바닷가재 요리를 시킨 적이 있었는데, 요리사가 가재의 등딱지를 열어보더니, 상에 올라온 멀쩡한 바닷가재 요리를 몽땅 쓰레기통에 처박는 거예요. 익히는 정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 너무 익혔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리고는 ‘미안하다, 좀 더 기다려 달라’며 나갔죠. 너무 익혔든, 덜 익혔든 맛이란 게 개인의 취향이고, 우리로서는 맛보기 힘든 음식이라 상관없이 맛있게 먹었을 거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던 기억이 나요.”
도선사의 길로
이귀복 회장의 선장 시절 에피소드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지만, 이 회장이 선장을 그만두고 도선사 시험에 도전할 결심을 굳히게 된 건, 아무래도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커 가는데,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갖게 된 부담감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회사에서도 이 회장이 20년 넘게 회사를 위해 공헌한 점을 인정해, 도선사 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유급휴가를 주면서까지 지원했다. 굳은 결심을 하고, 고시원에 들어가 시험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출제 경향 같은 걸 무시하고 무작정 책만 들입다 팠기 때문이라는 스스로의 진단에 따라, 다음 해에는 공부 방식을 바꿨다. 다시 1년간의 고행 끝에 다행히 이번에는 도선사 자격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선원이 되려면 3가지를 견뎌야 해요. 첫째가 외로움이에요.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유일한 변화라곤 해 뜨고 지는 것이 전부인 경우도 많아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런 숨 막히는 진공의 시공간에서 외로움을 친구로 삼지 못하면 절대 버티기 힘들죠. 여담이지만, 선원들이 항구에 정박하게 되면 거의 반사적으로 술집을 찾아가는 것도 뭍의 사람 냄새가 그리워서라고 저는 생각해요. 두 번째는 육체적 건강이에요. 배에서는 자기 건강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돼요. 세 번째가 가정의 건강이죠. 외로움도 잘 견디고, 육체적으로 건강하다고 해도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승선은 불가능해요. 미8함대 승무원들이 이혼율이 잦아 대책 마련에 골머리를 앓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예요. 예전에는 그나마 선원들의 임금이 월등했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견디며 승선했지만, 지금은 일반회사와 별반 차이가 없어서 우리 선원들이 점점 줄고, 해양대학 입학생도 덩달아 줄고 있는 실정이죠. 그 빈자리를 비교적 저렴한 임금의 동남아 선원들이 메꾸고 있는데, 해양 강국을 지향하고 있는 국가정책 차원에서도 장기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어요.”
도선사(導船士)란 말 그대로 선박의 입출항을 인도하는 사람이다. 항구의 조류와 수심의 변화, 다양한 종류의 선박 조종 기술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보통 20년 이상 경력의 선박 운항 전문가한테만 면허시험 도전 자격이 허락될 정도로 규정이 엄격하다. 항해 관련 직종의 ‘최정점’으로 ‘해기사의 꽃’이라 불리는데, 네이버 나무위키에서 ‘도선사’를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이 바로 이귀복 회장의 도선사 시절 모습이다.
“도선사들이라고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에요. 입출항하는 선박의 스케줄에 맞춰야하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이 들쑥날쑥해서 밤낮 구분이 없을 때가 많죠. 인천항 도선사의 경우, 40명이 20명씩 나눠 일주일 간격으로 근무시간이 바뀌는데, 저녁 11시에 바다에 나가 새벽 5시가 돼야 일이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입출항 선박이 밀릴 경우, 출항 배를 타고 나가 입항 배를 타고 들어오면 종일 잠을 한숨도 못 잘 때도 있어요. 특히 인천은 4월에서 8월 사이 유독 안개가 많이 끼는 기후적 특성상, 선박충돌 위험이 상존한 곳이에요. 집채만 한 선박이라 멀리서 보면 느리게 운행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스피드가 엄청나요. 레이더와 기술적인 충돌방지 장치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안개 중에 도선할 때는 스트레스가 많죠. 인천항 갑문으로 배가 드나들 때면 양쪽으로 겨우 1m 정도 밖에 여유가 없어요. 파도가 심한 날은 아슬아슬 곡예를 하는 것처럼 심장이 쫄깃쫄깃하죠. 물론 자부심과 즐거움도 많아요. 각 나라마다 도선 구역이 정해져 있어서 그 나라 도선사가 타야 입출항을 할 수가 있는데, 도선을 위해 배에 오르게 되면 식사 시간에 음식을 대접받기 마련이에요. 덕분에 각 나라 고유의 음식을 배 위에서 맛볼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죠. 공산권 국가나 러시아 선원들은 대부분 무뚝뚝해요. 자기네 소시지며 치즈, 그리고 커피와 우리나라 초코파이 같은 걸 내놓고는 먹으란 말도 없이 가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스나 스페인 배는 음식들이 화려한 편이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무래도 북한 배에 올랐을 때일 거예요. 보통 도선사가 타면 4명 정도가 참관하는데, 농담이라도 할라치면 깜짝 놀라 표정이 금방 굳어져요. 밥 먹겠냐고 물어서 오케이했더니, 얇고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쌀밥, 호박나물, 고추절임, 된장찌개 같은 걸 내오더라고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죠. 어려서 먹던 고향 강화도의 그 음식 맛과 완전 똑같았거든요. 진짜 맛있었어요.”
이귀복 회장이 인천도선사협회 회장을 거쳐 한국도선사협회 14대 회장으로 재임 때, 도선선이 바다이용료로 납부해오던 연간 5억 원 정도의 ‘수역이용료’를 폐지하고, 그 돈으로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유학 장학금’과 ‘동남아어린이 심장병 치료비’로 전환시킨 일화는 업계에서도 유명하다. 세계도선사협회(IMPA) 회의에 참석했을 때, 국제해사기구(IMO) 산하 ‘항해소위’가 서구권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실을 목격하고는, 우리도 영어 잘하는 글로벌 해양전문가를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또 바다를 공유하고 있는, 동남아시아권 국가들의 해양관련단체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동남아 어린이 심장병치료’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돌아가신 초대 이기상 회장님에 이어, 제가 15년째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직을 무임으로 맡고 있어요. 해상에서 23년, 도선사로 20년을 보낸 제 경험을 살려 인천항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죠. 현재 우리 인천항은 개선해야 할 부분들이 아주 많아요. 우선 우리 인천시민들의 ‘항만’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너무 낮아요. 해수부나 항만운영주체 공무원들 역시 이론은 잘 알지 몰라도,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요. 송도신항 계획수심을 애초에 14m로 설계했던 것을, 우리 협회를 중심으로 인천시와 인천정치권이 함께 해수부를 설득해 16m로 바꿔 놓은 사례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어요. 14m로 공사해놓으면 결국 동남아 항으로 전락할 것이 빤한데, 이왕 신항을 만들 거면 1,000억 가까이 공사비가 더 들더라도, 국가와 인천의 미래를 위해 당연히 글로벌항 규격인 16m로 만들어야 했죠. 인천대교도 애초에는 국토해양부에서 폭 700m로 설계했지만, 인천항의 미래를 생각해 지역사회에서 폭 1,000m를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폭 800m 높이 74m로 수정 건설된 덕분에, 지금 세계 각국의 크루즈선들이 문제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된 거예요. 인천항이 동남아의 모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그때 마련할 수 있었던 거죠. 인천항의 수심도 개선이 시급해요. 현재 곳곳이 8m, 9m, 10m로 들쭉날쭉해요. 계획수심인 14m에 못 미친 곳이 태반이죠. 이렇게 되면 짐을 덜 실어야 해서 선사들도 입항을 꺼려해, 인천항 운항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항만공사가 816억, 정부가 86억을 들여 항로준설을 한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수심이 확보되지 못한 곳이 많아요, 게다가 북항 일부 지역은 준설이 누락되어 항만운영에 문제가 심각해요. 그런데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신항 배후부지와 자유무역지역은 어떤가요? 이제까지 공공개발로 진행해오던 걸 갑자기 민간개발로 바꿔버렸어요. 임대료를 낮춰 항만발전을 위한 시설이 돼야 하는데, 민간자본이 개발하게 되면 나중에 어떤 문제가 불거질지 불 보듯 빤하잖아요? 점점 배후단지가 항만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는 게 현대적인 추세인데, 우리 협회와 인천시, 그리고 인천 정치권이 함께 이 문제를 잘 풀도록 해야죠. 저도 힘닿는 데까지 인천항의 미래를 위해 제 평생의 경험과 지식을 쏟을 작정입니다. 제가 제물포고등학교 재학시절 ‘무감독 고사’를 통해 배운 건, 내 노력으로 성취하지 않은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달콤해 보여도 결국 무의미하다는 진리예요. 혹자는 그 양심 교육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도 말하지만,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건 결국 끝끝내 양심을 지키고, 정정당당하게 길을 만들어온 평범한 사람들 덕이라는 사실을, 저는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