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럭, 수봉산 등반기
상태바
우럭, 수봉산 등반기
  • 미추홀학산문화원
  • 승인 2024.09.06 08: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味)추(追)홀 인천의 입맛을 찾다]
- 포구 어귀에서
(5) 산중턱에서 고부의 정으로 구워주는 우럭구이
인천in이 미추홀학산문화원과 함께 인천 음식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부에 이어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2부에서는 ‘인천의 입맛을 찾다’를 주제로 바다와 관련이 깊은 인천 음식의 인문지리적 정체성을 찾아나섭니다. '미추홀 살아지다' 시리즈로 출간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인천 음식이야기 기획은 미추홀학산문화원, 스토리 채집과 집필은 '학산미味담식회'(정형서 미추홀학산문화원 원장, 고재봉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강사, 김상태 (사)인천사연구소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정현숙 미추홀학산문화원 부원장, 조지형 전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임병구(사 인천교육연구소 이사장), 사진은 김상태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류제혁 '삼촌네 사진관' 대표)가 참여했습니다. 

 

설 쇠고 난 뒤의 모임이라도 여전히 겨울이라 그런지 수봉산 비탈길은 미끄럽기 그지없다. 초행이라 잡아탄 택시가 수봉산 중턱까지 오르면서 꽁무니에서 허연 김을 뿜으며 연신 한숨을 몰아쉰다. 아니 이런 산 중턱에 음식점이 있을까, 기껏 등산객들이나 먹을 도토리묵 따위나 먹자고 만나자는 것인가 하며 둘러보니 과연 동그마니 가게가 하나가 누워있다. 가게 이름처럼 흡사 소나무 한그루 서 있으면 어울릴 만한 자리에 나이 먹은 건물이 와송(臥松) 노릇을 대신하고 있었다. 워낙 천장이 낮은 오래된 건물이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것이라 와송처럼 보였나 보다.이런 가게를 또 어떻게 찾으셨담 하며, 오늘은 기껏해야 막걸리 추렴이겠구나 지레짐작하며 들어가려는데, 같이 오신 선생께서 둘레 구경이나 하자고 하신다. 상을 차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래 잠시 눈을 들어 바라보니 문학, 연경, 승학의 산맥이 어깨를 걸고 미추홀을 품고 있었다. 여전히 쌀쌀하건만 수봉산 중턱에서 맞이하는 저 산들의 치맛자락이 산뜻한 바람결로 이마를 탁 때린다. 몸에 들러붙은 군생각과 지난해 묵은 고민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듯하였다.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정지용, 춘설(春雪))

 

시인 정지용은 꽃샘추위를 이렇게 산뜻하게 표현하였다. 이마를 때리는 추위를 가지고 오히려 눈 덮인 산자락(뫼뿌리)을 이마로 맞이한다고 쓴 것이다. 정지용은 혹독한 일제강점기 말

기에 유난히 가을과 겨울에 대한 작품을 많이 썼건만 그 와중에도 저렇게 버선발로 아니 맨 이마로 봄을 맞을 채비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서 있는 수봉의 중턱이야말로 인천의 산자락을 온통 이마로 맞이할 수 있는 명당이었던 셈이다. 비록 산자락에 아직 봄눈이 없어 아쉽고 또 예전에는 송도 앞바다까지 보였던 전망이 아파트에 가리어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풍경을 눈앞에 두고도 투덜거렸으니 켜켜이 쌓인 마음의 먼지가 눈을 가린 것이 분명하다. 인천의 산과 바다가 두 볼에 가득 머금고서 뿜어내는 해풍과 산풍을 단박에 맞을 수 있는 자리라니, 소위 타워팰리스니 하는 요란스러운 건물들과 견주어도 이 가게는 꿀리기는커녕 오히려 압도하는 맛이 있다. 나지막한 건물 옆에서 굽어보는 인천의 풍광이 이 가게의 첫째 일미(一味)임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그래 감상을 뒤로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당장 오래된 난로와 연탄불 내음이 주인과 함께 우리를 맞아준다. 음식점 가운데에 난로와 연탄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손님상은 오히려 옆으로 밀려나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이유인 즉 이 난로는 단순한 난방기구가 아니라 조리를 위한 화덕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꾸덕꾸덕 말린 우럭을 석쇠에 올려 주인과 며느리가 묵묵히 탄불에 굽고 있는데, 결국 난로를 중심으로 손님들은 옹기종기 모여 음식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특이한 구조였다. 과연 겨울 산중의 분위기는 바야흐로 탄불의 향과 함께 무르익고 있었다. 상에는 고구마순, 박고지 따위의 건나물이 올라와 있고 얼음 저벅한 동치미와 배추김치도 있었다. 당장 동치미 국물부터 마셔보니 시원하다 못해 얼얼한 것이 가슴으로 후련하게 들어오며 한 겨울의 표정을 짓는다. 밖에 산자락에 눈이 남아있지 않아 운치가 아쉽다고 생각하였는데, “서늘옵고 빛난봄눈의 맛은 다름 아닌 동치밋국 안에 그득히 남아 골수로부터 이마까지 모골을 쩡하게 한다. 과장을 보태자면 사람의 손맛이 절반이고 겨울 수봉(壽鳳)이 내준 맛이 반절쯤 어린 것만 같았다. 국수를 말아 먹으면 인천 냉면과 자웅을 겨룰 만한 맛이었다.

 

우럭구이
연탄 난로불에 직접 구운 우럭구이

 

동치미와 나물이 산을 대표하는 선수라면 탁탁 튀는 탄불에서 제 몸을 구워낸 우럭은 바다를 대표하는 이 집의 간판이다. 우럭이라는 짐승은 워낙 기름이 많아 껍질에서도 진물이 흐르기 쉬운데 까닭에 여름에 말린 것은 자칫 군내가 나기 십상이다. 반면 겨울에 말린 것은 변질의 염려가 덜하여 간기도 삼삼하려니와 여름처럼 직사광선으로 기름 쩌는 일이 덜하다. 오히려 겨울에 꽉 찬 기름기가 살 속에 고루 스며 이렇게 말려서 구워내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낸다. 이런 건조 우럭의 경우 손질이 관건인데, 노주인이 양식이 아닌 자연산만을 받아 죄다 직접 배를 가르고 핏기를 말끔히 제거한다. 뼈에 핏기가 남아있거나 부산물이 들러붙으면 반드시 비린내나 악취가 날 수밖에 없기에 예리한 집도술을 요하는 작업이다.

노주인이야 30여 년 넘게 우럭 손질에 이골이 난 장인이라지만, 워낙 뼈가 단단하고 드센 짐승이요, 껍질과 내장에서 나는 기름 냄새를 감수하는 일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업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수고를 지불한다 하였다. 숙련된 노주인의 집도로 멀끔해진 우럭이 수봉의 산풍(山風)으로 비릿한 내음을 걷어내는 과정은 말 그대로 환골탈태라 할 만하다. 더구나 이를 가스불이나 기름 두른 팬이 아닌, 난로에서 시간을 태워 가며 탄불에 굽는다. 탄불에 석쇠를 뒤집어가며 굽는 생선이라니 입식 부엌이 들어선 이래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반가운 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인천 어시장에서 우럭이라는 녀석이 수봉산의 식탁까지 등반한 보람이 바로 이 탄불 구이인셈이다.

그러므로 이 나지막한 가게는 수봉에서 바라보는 인천 산자락의 풍광이 일미(一味), 가슴 쩡한 동치밋국이 이미(二味), 저 심해로부터 수봉산까지 등반한 우럭 구이가 삼미(三味)인 셈이다. 들기름에 구워낸 감자전이나 시원한 맛의 김치와 우럭, 간재미 따위의 비린 음식 등속이 산과 바다의 경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게 이 집 식탁의 특장이다. 하지만 재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쪽진 하얀 머리로 너그럽게 음식을 퍼주는 주인의 풍모도 수봉산과 어울린다. 그 하얗게 쪽진 머리는 눈 덮인 수봉의 또 다른 봉우리처럼 보였다. 전주에서 인천으로 시집와 삼십여 년 이곳에서 장사를 하였는데, 여전히 전라도 고창에서 직접 수확한 재료를 공수하여 음식을 만든다. 묵묵히 가게 한편에 앉아서 마늘을 까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치맛이 좋을 수밖에 없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시장에서 구매한 것이 아니라, 직접 키우거나 지에서 공수하여 다듬은 것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들기름으로 구운 감자전
들기름으로 구운 감자전

 

까닭에 김치를 담그는 날이면 밖에 서서 막걸리 손님들이 김치 좀 달라고 그렇게 성화를 하는 모양인데, 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김치를 찢어 손님 입에 넣어준다. 말이 손님이지 막걸리 한 병에 김치 안주 보시라니 남는 게 없는 장사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근래 먹어본 가장 깔끔하고 시원한 동치미와 김치인지라, 그 술꾼 손님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걸 마다 못하는 주인의 마음씨를 조금쯤 염치를 내려놓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렇게 산중턱 가게 밖에서 얻어먹는 김치 맛이라니, 주변머리 없는 나 같은 사람도 한 번쯤 취중 산행을 감행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치밀었다. 중턱까지 직접 등반하여 김치를 얻어먹으면 그 쾌미가 더 각별할 것만 같아서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다 보니 일이 많고 고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주인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며느리인 듯하였다. 흔히 고부라고 하면 한국 사회에서 갈등의 표본이라 할만하지만, 주인은 은근히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낸다. 그 안에는 반쯤은 고마우면서도 또 고된 음식 장사를 함께 거드는 데에 대한 여러 복잡한 심사가 있을 것이다. 사람을 함부로 인상 평가를 하는 것은 못된 버릇 축에 속한다. 하지만 가게를 두어 번 와보니 노주인과 젊은 주인의 선한 인상은 함께 있을 때 더 돋보이고 완성되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대한 존경이나 자부심을 언뜻언뜻 과하지 않게 드러내는 것도 이런 선한 인상에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길고양이에게까지 박하게 굴지 않고 인심을 쓴다고 시어머니 자랑을 하다니!)

이러한 까닭에 염치를 무릅쓰고 감히 막걸리 한 잔에 김치 좀 달라고 사람들이 보채는 것이 아닐까? 누울 자리도 봐 가며 발을 뻗으라고 했는데, 막걸리 술꾼들에게 있어서 수봉산의 비빌 언덕은 저 고부간의 합이 아닐까 한다. 결국 김치 맛에 취하든 막걸리 취기에 앉은뱅이가 되든 사람들은 굳이 수봉산을 등반하여 이 집을 찾아올 수밖에 없는 셈이다. 게다가 탄불에 굽는 우럭구이 냄새라도 맡게 된다면 무작정 밖에서 닝검닝검 김치만 얻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요 깍쟁이 같은 염치도 탄불 구이 앞에서는 무장해제 될 것이 뻔하다. 인정의 도타움이 호객을 위한 고도의 묘수라면 이 고부 사장님들은 대단한 고수임이 틀림없다.

기실 이 집에서 우리가 모인 것은 음식을 맛본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봉산 중턱까지 등반한 우럭을 뜯으며 복잡하고 다사다난했던 시간들을 곱씹기도 하였다. 시커먼 연탄과 난로를 가운데 두고서 좁은 자리 서로 어깨를 부비며 앉는 것은 겨울을 가장 따뜻하게 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사람이 일로만 만나는 것은 괴로운 노릇이다. 까닭에 친밀이며 인정이며 하는 감정들은 열심히 사는 저 고부같은 사람들이나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처방전이리라.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은 한 해였지만, 이마까지 쩡하게 만드는 동치미 국물로 미리 꽃샘을 맞이하고 새봄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 가게에서만 볼 수 있는 기가 막힌 인천 주산(主山)들의 풍광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마음을 꽁꽁 여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번다하면 김치 한쪽을 받아먹을 심산으로 직접 수봉산을 등반하리라. 저 심해의 우럭도 찾아와 누긋이 즐기는 산풍과 해풍인데 그것을 우럭에게 홀랑 빼앗길쏘냐. 기필코 정다운 사람들과 이곳에 다시 들러 먼지 털고 새봄을 이마받이 하리라 취기로 다짐하는 밤이었다.

 

연탄 난로불에 직접 구운 우럭구이와 동치미, 산나물이 있는 수봉산 정식
연탄 난로불에 직접 구운 우럭구이와 동치미, 산나물이 있는 수봉산 정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