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경인철도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를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1899년 9월 19일, 가히 교통혁명이라 할 수 있는
충격적인 경인철도 개통 기사가 세간에 보도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기차가 인천을 출발하였던 것이다.
한국철도 120년의 역사의 장을 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경천동지 할 사건의 주역은
미국제 모걸형 기관차, 무게는 35톤,
요란한 기적과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는 기관차를
마치 철갑을 두른 말과 같다 하여 사람들은 ‘철마(鐵馬)’라고 불렀다.
육로로 12시간 걸리던 서울과 인천 간의 거리가
한 시간 안팎으로 줄어들었으니 실로 엄청난 변모였다.
하지만
경인선이 개통되었다고 해서 민중들의 삶이 바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매우 비싼 기차 삯의 부담감,
시끄럽고 요란한 낯선 서양문물에 대한 거부감,
국모 시해에 대한 저항감,
이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낸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었다.
인천의 여명기, 개화의 상징인 철도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던 인물은
한국 대미공사 이하영이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착수하기에 재정적으로 열악하였고 여력이 없어
외국 자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일, 미, 영, 독, 러시아 등 경인 철도의 부설권을 따내기 위한 열강들의 다툼은 치열했다.
일본은 철도부설권을 따내려 획책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미국인 모스에게 특허하게 된다.
그러나 모스는 기공식 후 곧 자금난을 겪게 되자
부설권을 일본에 넘기고 만다.
부설권을 최종적으로 인수한 일본은 남은 공사를 모두 마치고
1899년 9월 18일, 인천역과 노량진역에서 개통식을 가졌다.
그렇게 인천 발전의 태동은 일본 세력의 강화에 따라 되었다.
일제는 1910년, 경인 철도를 조선총독부 수하에 넣고
본격적인 수탈을 감행한다.
1937년 들어 수인선과 수여선을 완공함으로써
조선침탈과 물자수탈을 위한 도구로 더욱 공고히 하였다.
씁쓸한 경인철도의 역사를 뒤로한 채 철마는 고고의 기적을 울리며 달려왔다.
비록 우리 자본과 기술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닐지라도
경인선 개통은 우리 교통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