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이충희 전 한국표준연구소 소장
- 김용범 / 푸른아시아 전문위원
더운 가을, 꿈의 온도를 만나다
올해, 다른 어느 때보다 아주 더운 9월이었다. 기후변화 때문에 그래도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고, 내년부터는 더 더워질 것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등장한다. 우리가 느끼는 9월 더위는 상당했지만, 뒤돌아 보면, 지구 평균 기온은 2010~2012년에 산업화 이전과 비교할 때 1.5℃ 상승했고, 2020년에는 1.8℃가량 높았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기후변화’가 전하고 있다. 머지않아 상승하는 온도가 2℃를 넘어선다고 한다.
이런 보도를 접하면서 누가 어떻게 온도를 측정하는지, 국가 간 온도 측정방식은 다 같은 것인지도 의문이 든다. 만일 이러한 온도가 지역 또는 국가마다 다르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비교할 수가 없어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를 피하고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을 ‘온도의 국제표준’이라 한다. 표준이란 측정량의 객관적 기준이다. 어떤 측정량의 표준은 국제적으로 일치해야한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 말까지도 변변한 온도 표준이 없었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세계 5위권의 표준 강국으로 괄목할만하게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을 이끌고 완성한 일등 공신이 이충희(인천중학교 3년제 1회) 박사이다. 청명한 가을날, 그러나 무더운 온도를 뒤로하고 ‘한국의 온도 표준’ 이충희 박사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만났다.
그를 만났을 때 첫마디는 “꿈을 가져야 한다”였다. 마치 꿈은 무엇인지 묻는 것 같았다. 점점 더워지는 가을에 더해 기후변화의 위기가 고조되는 시기에 꿈을 묻는 박사를 만났다. 누군가 요즘 꿈을 묻는다면 과연 뭐라고 답해야 할까?
한국 온도 표준의 완성
이충희 박사는 1977년 5월 교수로 재직 중인 경희대학교를 떠나 한국표준연구소(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KRISS)로 옮긴다. 연구소에서 대학을 가고자 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충희 박사는 연구를 하고 싶어서 남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과학기술입국’이라는 통치권자의 강력한 의지를 믿고 연구소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는 대덕연구단지를 개발하던 초기라 자녀를 대전 시내 초등학교까지 버스나 승용차로 40여 분 거리를 통학시키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앞으로의 희망으로 택한 길이기에 한 길로 매진했다.
그는 1977년 ‘국가계량표준실태조사’를 실시해 발표하였고, 한국의 계량표준실태를 조사했다. 미국 워싱톤DC 근교에 있는 게이더스버그 소재 NBS(미국 국립표준국, National Bureau of Standards)와 콜로라도에 있는 교정검사기관 등을 방문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후 표준연구소의 자매기관인 미국 NBS에 1977년 9월부터 1978년 2월까지 6개월간 온도측정분야의 객원연구원(guest worker)으로서 연수를 받는다.
당시 우리나라는 표준에 대한 개념도 희박할 때였다. 이에 따라 그는 미국 연수 후 귀국한 뒤 산업체를 찾아다니며 표준에 중요성을 설득하고 다니는 일부터 해야 했다. 1979년 5월부터 2년간을 초대 검교정본부장, 1979년 6월부터 1년 반 동안 기술담당부소장 등을 역임한다. 이때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등 국가교정검사제도를 연구 조사하여 한국의 전국적인 국가검교정망의 설치와 국가검교정제도를 입안하고 확립했다. 이후 ‘표준’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고, 1988년에는 한국표준연구소 4대 소장에 취임했다.
이충희 박사의 성품은 부친을 닮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은 공무원이었는데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을 나누어주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적산가옥을 담당했다면 여러 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부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골고루, 합리적으로 분배해 주었다. 그러한 부친의 성품과 곧은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공정하게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흔들리지 않고 한국 온도 표준의 기초를 닦아 나갈 수 있었다.
이충희 박사는 국내 최초로 측정과학 분야의 연구 논문을 해외 저명학술지에 게재했으며, 한국표준연구소 소장 등을 거치며 정밀계측기기 부품기술개발에 몰두했다. 그의 업적을 평가한다면, 우선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측정과학분야를 개척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국가 온도표준원기를 개발하여 온도 표준을 확립하는 등 국가 표준분야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한국물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온도측정 표준연구'라는 논문으로 제35회 3·1 문화상 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이충희 박사는 초창기 표준연구소의 미비한 연구체계를 확고히 하여 연구의 수준을 높이고 국가표준분야의 선구자로서 한국표준연구소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국가표준의 중장기 발전계획의 수립을 통하여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2003년 4월 21일 대전 KAIST에서 개최된 과학의 날 행사에서 과학기술훈장 혁신장을 수상하였다.
표준연구소에서의 기억
표준연구소에서 연구하던 시절의 기억에 대해 그는 두 가지를 언급했다. 하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악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뉴턴의 사과나무였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외에도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여러 대통령들과 악수했었다. 그런데 대통령과의 악수 중에 가장 진정성이 느껴졌던 이는 박 대통령이었다고 회상했다. 연구하고 싶은 진심 어린 마음으로 대학에서 표준연구소로 옮겼던 이충희 박사와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이충희 박사의 말을 들어보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독재자라는 비판도 있지만, 과학기술 발전에 초석을 닦은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다음으로 언급한 것은 뉴턴의 사과나무였다.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뉴턴이 역학의 법칙을 확립하고 166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을 때였다.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학교가 휴교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사과나무 아래서 독서하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알려졌다. 영국은 이 뉴턴의 사과나무를 이식하여 국립식물원에 보관했다. 그리고 이 사과나무는 국립식물원으로부터 영국국립물리연구소(NPL)에 접목 이식되었고, 여기서 과학기술 전달의 상징으로서 미국립표준국(NBS)에도 사과나무를 보냈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가 설립되고 NBS와 자매관계를 맺고 측정표준기술지원을 NBS로부터 받게 되자 NBS는 뉴턴의 사과나무를 접목하여 한국에도 보냈다. 뉴턴사과나무의 4대손을 한·미간 과학기술협력의 상징으로 한국표준연구소에 전달하게 된 것이다. 뉴턴에서 시작한 과학기술의 상징이 한국에 전달되는 뿌듯한 순간을 온 몸으로 느낀 것이다.
전란과 생활고의 학창 시절
이충희 박사는 3년제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이다. 그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했다. 6월 전쟁 중에는 인천 읍내(지금의 문학동)로 피난을 갔었다. 피난 도중 경인국도를 횡단하면서 인민군과 마주쳤는데, 인민군보다 총이 길어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이 길어지자 다시 용동의 집으로 돌아왔고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다. 당시 3일간 폭격이 있었는데 포탄이 발사되면 반대쪽에서 포탄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집은 폭격을 당하지 않아 피해가 없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날 듯했으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1.4 후퇴가 일어났다. 이충희 박사는 가족과 함께 고생 끝에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건강을 잃었다. 앞으로 밀어 닥칠 생활고가 예고되고 있었다.
5개월간 부산 피난 생활을 끝내고 가족들은 1951년 5월에 인천 집으로 복귀하였다. 당시 UN군이 인천중학교 교사를 사용 중이어서, 인천 신흥동에 있는 신흥국민학교 교사를 빌려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1951년 8월에 인천중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길영희 교장 선생님의 친필 상장과 경기도 표창장을 받았다.
수석 졸업의 기쁨도 잠시, 피난 과정에서 얻은 간경화로 부친이 돌아가셨다. 어려운 시절, 가장이 사라진 가정의 가세는 기울어질 수 밖에 없었다. 누나는 대학을 포기하고 다과점을 시작했고, 어머니는 하숙을 쳤다고 한다. 장남이었던 이충희 박사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미군 수송선 검수원을 하는 등 경제활동을 해야 했다. 생업에 바쁘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고, 결국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결단한 그는 고2 때부터 학업에 매진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1954년 대학에 입학하여 교복과 모자를 쓰고 서울대 문리과대학 배치를 달았다. 청춘의 꿈과 낭만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대학은 낭만 그 자체였다. 5월이면 라일락꽃과 향기가 가득한 교정에서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사색했고, 가을이면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떨어진 길을 걸으면 시인처럼 시심이 저절로 떠올랐다. 특히 이 박사는 오페라를 좋아해 물리학과 모임에서 자랑삼아 인천극장에서 본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대학 교정의 낭만과 생활고는 별개였다. 극심한 생활고는 계속되었다. 등록금을 포함해 생활비를 해결하고자 입주 과외를 하며 문간방에 기거했는데 바닥이 차가워 늑막염에 걸렸다. 처음에는 인천기독교병원에 입원했고, 간호사들이 정성껏 돌보아주었지만 좀처럼 쉽게 낫지 않아서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대한적십자 병원으로 옮겨가서 3개월 정도 입원 후 상태가 호전되었다.
길영희 교장과 맺은 새로운 인연, 제고 전임강사
이충희 박사는 길영희 교장 선생님에 대해 훌륭한 분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거듭한다. 그는 1958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인천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 길영희 교장 선생님을 찾았다. 길 교장은 그가 인천중학교 수석 졸업생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박사의 사정을 듣고 난 후 1년간 전임강사로 제물포고교 2, 3학년 상급반 물리학 강의를 맡겨주었다. 덕분에 가족 생계도 책임지면서 대학원 진학 준비가 가능했다.
그는 인중·제고 교사로 재직하던 3년이 자신의 인생을 바꾼 시기라고 회고했다.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고, 미국 브라운 대학 유학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브라운대학교에서 물리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경희대학교 교수,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한국물리학회 제15대 회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창립정회원, 한국시니어과학기술인협회 창립·초대 회장 등 중요 직책을 거치며 활동할 수 있었다.
이충희 박사는 길영희 교장의 교육철학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인천중학교 시절 초청 강연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연사로 오신 이들의 강연 덕분에 자신이 열심히 배우고 꿈을 꿀 수 있었다고 했다. 초청 연사 중 기억나는 사람들은 고려대학교 총장 현상윤 박사, 나중에 연세대 총장이 된 백낙준 박사, 그리고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변영태 박사 등이었다.
삶의 반려자를 만나다.
Brown 대학은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지방)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시에 있는 아이비리그(Ivy League) 중 하나다. 브라운대학에 입학허가를 받고 출국 준비를 시작했지만, 비행기 삯이 문제였다. 196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로 최빈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고에 50불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항공료를 후불하는 조건으로 1962년 3월 외상 비행기를 타고 브라운 대학으로 갈 수 있었다.
브라운 대학에 도착해서 수강과목을 신청하고 연구조교를 했고, 그에 따른 장학금은 수업료 면제 외에 9개월에 3,600불이 생활비로 지급되었다. 덕분에 미국 도착 3개월 후에 노스웨스트 항공사에 항공료를 갚았다. 장남으로서 역할도 했다. 한국에 계신 연로한 모친에게 매월 생활비를 송금해 생계를 도왔고,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의 학비를 냈다.
미국에서 맞는 첫 크리스마스, 이충희 박사는 운명의 배필을 만난다.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들과 파티를 위해 자동차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보스턴과 우스터(Worcester)에서 학생을 초청했는데, 이 박사는 클라크(Clark)대학 화학과 박사과정의 권순자 님을 마중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유학 준비로 서울 외무부 여권과에 여권을 받으러 갔을 때 만났었고, 신기하게 여권번호도 하나 차이였다. 그 인연으로 2년여간 편지를 주고받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미국에서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양가 부모님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삶의 동반자도 만날 수 있게 도왔던 것이다.
결혼 후 신랑 신부는 따로 있는 것이 불편해 6개월 후에 부인이 클라크대학에서 브라운대학 화학과로 전학했다. 그리고 이 박사는 1969년 12월 박사학위논문 심사에 합격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1년여간 브라운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었고, 과학기술처로부터 귀국 여비와 정착 보조금을 받아 1971년에 경희대 교수가 되어 귀국했다. 이후 부인도 화학과 박사학위를 받고 경희대 교수로 부임하여 부부 교수가 되었다.
꿈을 꾼다는 것
이충희 박사는 1994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창립정회원으로 참여했다. 어어 총괄부원장, 이사를 역임하고 2004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발전사를 편찬하는 등 초창기 한림원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 종신회원이다. 이충희 박사는 정년 무렵부터 자기 지식을 후학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2년간 고려대학교 객원교수로 강의했고, 이후 아주대학교 대학원,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등에서 강의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6년부터는 은퇴한 시니어 과학기술인의 활용 가치를 인식하고 한국시니어과학기술인협회(시니어과협, KASSE)를 창립했다. 초대, 2대, 3대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시니어과학기술인협회는 과학창의재단, 과총, 기초과학연구원, 기상청 등의 수탁과제를 수행하면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것으로 청소년 과학꿈나무 육성 교육사업이다. 청소년에게 과학강연, 과학교실, 청소년과학영재멘토링 등을 실시해 과학에 대한 청소년의 흥미를 유발하고, 과학영재 발굴을 목적으로 한다. 이 박사는 아직도 강연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덕분에 최근에는 도전한국인본부로부터 도전한국인 대상(국가대표 33인)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활동을 돌아보니 만나자마자 처음 했던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귓가를 스친다. 그리고 연구를 위해 교수마저 마다하고 한국표준연구소를 향했던 그의 발걸음이나 은퇴 이후의 활동을 보면서 꿈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더구나 올해처럼 여름 같은 9월을 보내며 기후 위기를 실감하는 지금, 더더욱 꿈을 가지는 것이 필요해 보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미수(米壽, 88세) 기념문집에서 꿈을 이루는 방법으로 자신의 미래 이력서를 작성해보라고 권고하고, 퀴리 부인을 언급하면서 끈질김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