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유인선 전 서울대 교수 - 김락기 / 문학박사
한국 동양사학의 지평을 넓힌 연구 성과
한 나라, 한 사회의 학문적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분야별로 편차가 큰 경우와 모든 분야에서 고른 수준을 갖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전체 분야에서 비교적 고른 수준의 사회가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흔히 구분하는 역사학의 분류 중 한국사의 경우는 양적, 질적으로 한국이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춘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역사학의 수용은 늦었지만 해방 이후 70여 성상에 걸친 시간은 한국 연구자들이 한국사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반면에 동양사나 서양사는 특정 분야에서 빼어난 성과를 올린 한국 연구자들이 적지 않지만 편중되었다는 인식을 지우기 쉽지 않다. 한국 각 대학의 동양사학 담당 교수들은 대체로 중국사, 일본사 순으로 많고 그 외 지역이나 국가 전공자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서양사학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전공자들이 있으나 아랍, 아프리카사 전공자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적으로도 관계가 적지 않았고, 근래 들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관계가 부각되고 있는 베트남의 역사를 공부한 유인선(劉仁善)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 동양사학계에서 매우 상징적이고 특별한 존재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뉴스레터 2013년 2월호에 실린 대담에서 “어떤 계기로 베트남 역사에 관심을 갖고 평생 연구, 교육에 앞장서게 되었나?”라는 질문에 대해 “베트남 역사를 공부한지 46년이 되었는데, 베트남 역사를 전공하게 된 것은 베트남전쟁과 관련이 있다. 1965년 봄, 미국은 베트남에 지상군을 투입시키고 우리 정부도 그 해 가을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베트남전쟁의 확대와 더불어 미국에서는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을 자주 왕래하던 제 은사, 전 고려대학교 김준엽 총장께서 한국에서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절실함을 인식하고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가져보라는 권유를 했고, 연구의 첫 단계는 우리와 문화가 유사한 베트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주었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미개척 분야를 연구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베트남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답변했다.
강제징집된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이자 평생 중국에 대해 연구한 저명한 학자인 스승이 미래를 내다보며 제자에게 조언했고, 그 조언을 받아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 제자의 결기가 한국의 동양사 연구에 분기점을 만든 것이다.
베트남사 연구자로서 유인선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 1984년 민음사에서 ‘대우학술총서’로 펴낸 《베트남史》였다. 이 책 출간을 알리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베트남전쟁, 국군의 파월(派越) 등으로 베트남이란 이름에 오래전부터 친숙해 있지만, 그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작 정치적인 현상분석 정도였지요. 게다가 동양사 연구 자체도 중국사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세에 들어 외세 침입에 의한 식민통치, 오늘의 남북분단의 비운이란 관점에서도 베트남의 역사는 우리와 관련성이 많습니다. 곧 한국역사의 이해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이를 테마로 저술한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단순한 학문적 관심을 넘어 우리 역사 이해에 보탬이 되기 위한 저술의 목적을 분명히 한 것이다.
모두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베트남의 풍토와 민족에 대한 검토와 소개를 기초로 해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기원전부터 끊임 없이 지배를 시도한 역대 중국 왕조와 베트남인의 저항, 베트남 역대 왕조의 변천 및 성격,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과 식민통치에 저항한 베트남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 제목 그대로 베트남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출간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지금 읽어도 유효한 이해를 제공해 준다. 특히 베트남 역사 연구의 동향을 소개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반 대중의 생활까지 연구영역이 넓어지면서 “그 사회는 본질적으로 중국과는 다른 고유의 특성을 지녔었으며, 이러한 성격은 중국문화와 접촉하는 가운데서도 변함이 없었고, 또 중국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를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자기네들의 편의에 맞게끔 변형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한 것이 주목된다.
아주 최근인 2024년 10월 7일 베트남 국가주석은 식민지배했던 프랑스를 방문해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는 데 합의했는데, 이 기사를 전하며 국내 언론은 ‘대나무 외교’라는 표현을 소개했다.
“굳건한 자주 원칙과 유연한 전략으로 자립과 국제 협력의 균형을 추구하는 외교 전략을 단단한 뿌리와 튼튼한 줄기, 유연한 가지가 있는 대나무의 특성에 빗댄 것”이 베트남의 대나무 외교라는 것이다.(<서울경제> 2024년 10월 14일 “[만파식적] 대나무 외교”)
베트남의 역사와 현대 베트남의 외교정책을 직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위험의 소지가 없지 않지만 고대로부터 역대 중국 왕조와 오랜 갈등을 겪어왔고, 근대에는 식민지로 전락했던 경험 속에서 새로운 시대로 나가기 위한 나름의 모색이라는 점은 분명하며, 그 배경에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우리나라로서는 충분히 참고할 만한 사례일 것이다.
이처럼 역사 연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확인해 드러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워 어떻게 앞으로 나가는 데 참고할 것인가 라는 성찰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을 ‘미래학’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유인선이 베트남사를 연구하면서 내놓은 성과를 통해 한국 사회에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 역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앞서 소개한 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터와의 대담에서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출판 후 한 중국사 전공교수는, ‘이 책은 중국사 전공자보다 한국사 전공자에게 더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집필을 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한국사, 한일관계사 및 한중관계사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와 비교하는 관점에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에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중관계 연구에 있어서도 베트남 연구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중ㆍ일 영토문제보다 훨씬 국제적으로 관심이 쏠려있는 동남아 영토문제 상황을 지켜보면서 시사점을 얻어야 한다.”고 언급한 점에서도 유인선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연구는 진지했고, 하나하나의 성과는 모두 한국의 베트남사 연구의 새 길을 열었다. 1990년에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Law and Society in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y Vietnam》란 제목의 영문 저서를 출간해 연구 역량을 세계에 알렸으며, 한국 독자를 위해 《근세 베트남의 법과 가족》(위더스북, 2014)으로 번역해 펴내기도 했다. 대학에서 퇴임한 2007년 이후에도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창비, 2012), 《베트남 - 역사와 사회의 이해》(세창출판사, 2016), 《베트남의 역사 - 고대에서 현대까지》(이산, 2018) 등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수준높은 연구성과를 쌓아온 학자에 대해 베트남 학계와 사회도 주목하지 않을 리 없었고, 2012년에 하노이국립대학은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제안했다. 짐작일 뿐이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이며 무척 다양한 감정 속에서 어려운 연구를 지속해 온 보람을 크게 느꼈을 것 같다.
정년을 맞아 2007년 2월에 서울대의 <대학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국내 베트남 역사 연구 1세대로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연구 생활을 비롯해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행운이 있었던 것 같다”며 담담하게 회고했는데, ‘행운’이라 표현할 만한 상황은 온전히 유인선이 어린 시절부터 내보였던 성실함으로 스스로 만들어 간 것일 수 밖에 없다.
“수련의 마당 인중․제고”
유인선은 1941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나 인천중학교를 7회로, 제물포고등학교를 4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 고려대 동양사학과에 진학해 1964년에 졸업하고, 1970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진한시대의 월남〉이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미시간대학교에 유학해 동남아시아사 연구로 1978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에 모교인 고려대 사학과에 교수로 부임해 후학을 양성했고, 1994년 3월부터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로 옮겨 연구와 교육을 지속하다 2007년 2월 정년퇴임했다.
평생 학문의 외길을 걸은 학자의 삶 속에 인중과 제고의 6년이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수련의 마당 인중․제고”는 유인선이 《길영희선생추모문집》제5개정판(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 1999)에 직접 쓴 제목이다.
교가 4절을 시작하는 “여기는 수련의 마당”에서 제목을 따온 이 글에서 추운 겨울날 매일 아침 빠짐없이 하던 운동장 조회와 한 달에 한번 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치 않고 가야했던 소풍을 떠올리고 있다. 조회가 끝나고 학생들의 선두에서 운동장을 몇 바퀴씩 뛰어돌던 교장 선생님의 모습에서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귀감을 보이려 했던 뜻을 읽어내고, 겨울철 문학산 토끼 사냥 소풍에서 역경을 헤쳐 나가는 훈련을 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
이런 이해는 “필자는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로 건강한 편이 못 된다. 그래도 남들이 하는 일이라면 어지간히 어려운 일도 빠지지 않고 해내려 애썼고 또 실제로 해내기도 했다. 그러기에 옆에서 보는 이들은 필자더러 강단이 있다고 말하고, 필자 자신도 이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강단이란 바꾸어 말하면 강한 정신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자가 강한 정신력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하면 그 원인은 인중․제고 6년 동안 길교장 선생님의 기르치심 덕분이 아닌가 한다”는 회상으로 이어진다.
선행 연구도 거의 없고, 자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 베트남사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일가를 이룬다는 것은 강한 정신력으로 닥쳐오는 연구상의 난관을 뚫고 나가겠다는 의지와 그 의지를 실천으로 증명하는 꾸준함이 뒷받침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요즘 시대와는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1950년대 인중․제고에서의 수련이 한국 베트남사 연구의 최선두에 선 학자를 키운 셈이다.
중․고교 시절 유인선의 활동은 교지 《춘추》에 일부 남아있다. 《춘추》 제2호에는 이별한 친구와 손 맞잡고 같이 오르던 산을 혼자 오르게 된 상황을 문학적인 필치로 그려낸 “추억”을 실었고, 제3호에는 뜻밖에도 “겨울 철의 꽃재배”란 제목으로 간이 온실을 만들어 ‘사이네리아’, ‘가루세오라리아’, ‘판지’, ‘시크라멘’, ‘츄립’ 등 지금과는 부르는 방식이 다른 화초 기르기를 소개하고 있다. 꽃 재배의 의미를 설명하며 “날카로워만 가는 이 신경을 부드러히 달래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가? 깨끗한 향기 따스한 색깔 아름다운 자태의 한 떨기 꽃에서도 위안을 느낄 수 없이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꽃을 사랑하고 꽃을 가꾸어 보자. 꽃가꾸기는 사치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일부이다”라고 쓴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까까머리 고교생의 낭만을 넘어선 세상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글이다.
《춘추》 제4호에는 ‘인물론’이란 항목에 “마하트마 깐디”의 생애와 활동의 의미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길지 않은 글 속에서 서양 열강이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드는 시기를 배경으로 간디의 성장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아시아인을 위한 투쟁, 인도로 돌아와 펼친 비폭력투쟁,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분쟁 조정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힌두교도에 의해 죽음을 맞는 과정까지 간결하게 서술했다. 역사 연구자로서의 자질 역시 이미 고교 시절에 키워온 것인지도 모른다.
유인선이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본격적인 베트남사 연구에 뛰어든 1960년대 말로부터 어언 50여년을 경과했다. 그 사이 유인선이 길러낸 후학들이 국내․외에서 중국사와 일본사에 편중된 연구 상황을 극복하고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각국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착실한 성과를 쌓아왔다.
‘월남파병’으로 마주보고 싸우며 많은 논란과 갈등을 겪었던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수교 이후 다방면의 교류를 진전시켜 이제는 한국인이 찾는 대표적 국외 관광지의 하나가 될 정도로 익숙해졌다. 결혼과 노동 이민으로 한국에 정착했거나 한국을 경험한 베트남 국민들의 숫자도 적지 않다.
유인선이 이런 변화를 예상하고 베트남사 연구에 뛰어든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앞장서 걸어간 연구의 현장이 현재로 넓혀졌고, 상호 이해를 높여 공존하려는 노력에 밑바탕이 되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인천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이유가 차고 넘치는 유인선의 연구 역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