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을 꺼내 입고 싶은 마음
상태바
내복을 꺼내 입고 싶은 마음
  • 박병상
  • 승인 2012.01.10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in 칼럼] 박병상 /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이맘때 유치원 버스 운전기사는 아이들 내릴 때 특히 조심해야 한다. 따뜻한 집에서 나와 버스 올 때까지 아파트 현관에서 기다리는 사이, 추위에 떨까봐 긴 외투에 털모자, 장갑에 목도리까지 두룬 꼬마들은 대개 천방지축이다. 유치원 버스에 오를 때 엄마의 배웅과 선생님의 보살핌을 받지만 내릴 땐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다. 아파트는 물론 따뜻하지만 유치원 버스도 따뜻하고, 유치원 또한 따뜻하다. 목도리를 빙빙 두른 아이들은 더운 실내에서 벗어두었다 집으로 갈 때 다시 두를 텐데, 아무래도 집에서 나올 때보다 꼼꼼하지 않다. 그런 방심이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미국과 유럽과 일본, 그리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대부분 국가들은 유치원 버스가 길 가에 정차하면 상행이든 하행이든 모든 차선의 차들은 즉각 정차한다. 내린 아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인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배려에 익숙하지 못하다. 유치원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뒤에서 차분하게 기다리는 차도 드물 뿐 아니라 아이들이 길을 건너는데 추월하려는 차도 아파트 단지에서 심심치 않게 본다. 응달의 눈이 얼어붙은 도로에서 자칫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유치원 버스 기사도, 아파트 단지 내의 이웃도, 바깥의 운전자도, 유치원 버스를 보면 차를 조심스레 운전해야 한다. 외국처럼 아예 유치원 버스가 움직이기 전까지 상하의 차선 모두 정차하는 게 나을 성싶다.

수년 전 이맘때, 아파트 단지에서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정차한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아이가 지나치던 이웃의 차에 부딪힌 사고가 아니었다. 바로 마중 나온 엄마가 보는 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졌다. 선생님도 타지 않은 유치원 버스는 짧은 시간에 바삐 움직여야 했고, 더운 버스 안에서 외투를 느슨하게 입은 아이가 미처 다 내리기 전에 운전기사가 출입문을 닫고 출발했는데,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외투 깃이 출입문에 낀 아이는 출발과 동시에 차 밑으로 딸려 들어갔고, 희생자를 안고 오열한 이웃은 이사를 떠나고 말았다. 아이나 어른이나, 평상시 추위에 익숙했다면 피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

겨울이면 당연히 내복을 입었던 시절, 유치원에서 선행학습을 생각하지 않았던 바로 그 시절의 아이들은 겨울에도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물을 뿌린 논에 스케이트를 타거나 논고랑 물이 얼면 썰매를 타고 놀았다. 파란 하늘에 올라간 연 사이에 매가 선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였는데, 온난화로 얼음이 잘 알지 않지만 스케이트나 썰매를 탈 공간도 없는 요즘, 아이들은 겨울이면 따뜻한 실내를 거의 떠나지 않는다. 여름에도 에어컨을 시원하게 켜둔 실내에서 컴퓨터에 빠져 있거나 선행학습에 치인다. 그러니 먼지와 화학물질에 둘러싸인 아이의 몸은 약하고, 추우면 감기를 걱정해야 하는 엄마는 동작이 둔할 정도로 잔뜩 껴입힌다. 겨울에도 간장독과 아이들은 얼지 않는다 했건만, 다 옛 이야기가 되었다.

따뜻한 실내 생활에 익숙해진 요즘, 관공서 난방 온도를 섭씨 20도 이하로 맞추자, 여기저기 불만의 목소리가 터진다. 평소 내복을 입는다면 20도가 춥다 느끼지 않겠지만, 집도, 교통수단도, 웬만한 건물도, 실내는 거의 덥다. 내복을 입으면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를 정도다. 사 놓았던 내복을 입으려 해도, 불편할 정도로 더운 겨울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에게 느닷없는 영상 20도는 정말이지 춥다. 겨울이면 투박한 내복 입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시절, 간장독과 아이들이 얼지 않았던 시절, 실내 온도 영상 20도면 황송했건만, 요즘 우리는 예전에 없이 덥게 산다. 그래서 애나 어른이나, 사시사철 감기를 달고 산다.

독일 수도 베를린의 최고 한식당에 들어가니 은은하게 어두웠다. 독일인 상식에 아무렇지 않은 밝기였지만 우리에겐 낯설었다. 그런 독일인이 우리나라 주택에 들어서면 놀란다고 한다. 애나 어른이나, 한겨울에 반팔 속내의 차림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이란다. 소득 수준이 2배 정도 높은 독일인보다 난방이 철저한 우리나라는 언제부턴가 겨울마다 전기 사용량이 늘어 걱정이다. 이 때문에 핵발전소를 더 지어야한단다. 이미 가동 중인 핵발전소마저 세계 최고의 밀도를 자랑하는데, 더 짓는다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을까. 일본의 예를 보아도, 핵의 안전신화는 없다. 밀어붙이는 방식에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데, 우리는 핵발전소 건설과 가동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자들의 안락을 위해 내일이 저당되었다.

17기의 핵발전소를 즉각 9기 끄고 나머지 모두를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하기로 한 독일의 결정이 갖는 환경적, 그리고 윤리적 의미를 외면하는 우리나라는 화력발전소의 밀집 역시 대단하다. 당연히 석탄과 가스의 사용량이 많을 수밖에 없고, 온난화되는 추세도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빠르다. 도로 뚫리기 무섭게 늘어나는 자동차가 소비하는 석유의 양도 무시할 수 없다. 그뿐인가. 열효율이 낮은 주택과 상가 건물, 그리고 공장과 농장에서 소비하는 화석연료의 양도 막대하다. 지구촌 석유 매장량은 한정돼 있고, 소비하는 양에 비해 퍼올리는 양이 적은, 이른바 ‘석유 정점’(peak oil)을 이미 넘어선 마당이라는데, 언제까지 이런 낭비가 허용될 수 있을까.

이번 겨울에도 사놓은 내복을 입을 것 같지 않다. 추위를 덜 타는 체질 덕분이 아니다. 가까운 거리를 걷다 들어가는 실내나 대중교통이 언제나 덥기에 내복을 입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건강과 안정을 위해 이제 우리 에너지 소비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후손들도 우리와 조상이 그랬듯, 석유 고갈과 관계없이 이웃과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의 에너지 낭비구조를 바꿔야 한다. 내복과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으로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이제 그 연습이 필요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