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어른들의 고백이 필요하다
상태바
먼저, 어른들의 고백이 필요하다
  • 이혜정
  • 승인 2012.02.01 14: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요칼럼] 이혜정 / 청소년창의문화터 미루 공동대표


부산하기 그지 없다. 연일 학교폭력이 우리 사회에 처음 등장한 괴물인양 놀라고, 그 대책마련을 위해 다양한 회의와 회합이 마련되었다. 심지어는 명절날 모여 앉은 자리에서도 조금 심각한 얼굴로 "너희 학교에서 맞는 애는 없냐, 너희 반에 왕따는 없냐?"고 확인을 했다. 아이들은 머쓱해 하며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의심이 감추어지지 않는 얼굴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학교폭력의 심각함을 지적하고 해결하겠다는 단호함은 결연하다. 강력한 감시와 처벌 위주 대책들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은 학교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학교폭력 문제에 경찰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학생들이 새로운 분위기에서 새 학년을 맞이하도록 하겠다"라고 한다. 일반 범죄자를 다루는 형사 인력도 학교폭력 사건에 투입해 소위 '일진회' 등 폭력 서클을 집중관리한다고 한다. 학교폭력으로 2회 이상 입건된 경력이 있는 학생은 특별관리 대상으로 분류해 '문제학생 명단'을 만들어 관리한다고 한다. 학교판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질 태세다. 과연 이런 감시와 통제 위주 대책들이 아이들의 삶을 바꾸고 폭력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집으로 날아든 '학교폭력 실태 전수 조사 설문지'로 아이들의 삶이 달라질 것인가?  겉으로 드러난 학교폭력의 양상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복잡하게 얽힌 학교폭력 그 심연의 이유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다시 피해자와 가해자와 방관자로 나뉘고 그 모두는 문제 해결의 대상으로 놓이는 것은 아닐까?

청소년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는 가운데 느끼는 것은 유독 몇 년 사이에 아이들이 더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시험 전 2주 정도 학원 보충수업이 있었다면, 근래에는 한 달 전부터 보충수업이 시작된다. 일제고사 한 달 전부터 조기등교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교과 진도는 일제고사에 맞추어 후다닥 끝내졌고, 학습지 문제풀이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활짝 꿈나래를 펼칠 시기에 아이들은 하나 둘 꿈을 접기 시작한다. 성적으로 이루어진 긴 서열의 어느 위치에 자신이 존재하는 자각하면서 아이들의 존재감은 성적과 같은 위치에서 멈춘다. 게다가 슬금슬금 자신감을 잃고 있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성적 추락만큼 강도로 상승된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공부하라고. 

아이들은 그래서 이렇게 진단한다.

"지금 학교는 무조건 등급을 나누고 경쟁을 시키잖아요. 공부를 잘하기 위해 경쟁하라고 하고, 친구를 이기라고 가르쳐요. 그런데 공부는 경쟁하라 하면서 친구관계는 친하게 지내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연스럽게 경쟁구조가 공부만이 아닌 모든 부분에서 작용하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배우니까요."

"저도 비슷한데요, 모두가 최고가 되려고 하고 사회에서 어른들도 승진에 목매고, 경쟁하잖아요. 그래서 힘 있는 애들한테도 줄을 서지만 공부 잘하는 애들한테도 잘 보이려고 해요. 학교 자체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 같아요." ( 토론회 참석 학생들의 이야기)

성적서열로 아이들이 재단되는 현실에서 아이들의 불안과 절망은 공격적인 방식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경쟁과 서열화, 입시만이 살 길인 획일적인 교육제도. 이 속에서 아이들은 따뜻하게 친구를 만날 수 없다. 선생님들과도 무엇 하나 소통할 수 없다. 부모와도 편안하게 마주할 수 없다.

온 사회가 부를 향한 경쟁으로 얼어붙고 그 축소판인 학교에서는 '성적 서열'로 얼어붙고 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자기세계에서 구축한 힘의 논리로 자신들만의 서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힘을 행사하고 많은 아이들은 침묵했다. 이 아이들의 죄라면 어른들 삶의 방식을 너무도 철저히 학습하고 그대로 따라한 것이 아닐까?  간디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들이 미국 국민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 때 간디는 "내 삶이 곧 메시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 어른들의 삶이 청소년들에게 전달한 메시지들은 어떤 것일까?

하루아침에 모든 일생의소망을 쏟아부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용산철거민들에게 돌아온 답변은 무지막지한 폭력이었다. 그 폭력 앞에 사람들이 죽어갔다. 쌍용자동차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생채기 나고 쓰러졌다. 그리고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비정규직 900만 시대에 우리가 서 있는 서열의 순위를 가늠하며 떨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을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재벌가 딸들이 동네 빵가게마저 접수하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먼저 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어른들의 비정함을 학습한 것은 아닌가?

대구의 그 아이는 죽음으로 겨우 용기를 냈다. 그 아이는 마지막 유서에서 친구들도 자신에게 잘해주었다고 했다.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정작 자신의 아픔과 절망을 이야기할 만한 사람을 갖지 못했다. 절망 속에서 우리에게 처음으로 마음의 자락을 내보인 그 아이. 그 마음을 대충 덮어버리는 것으로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른들도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불안에 떨고 있어 너희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고, 너희들을 안아주지 못하고 있었다고. 우리가 만들어 낸 세상에서 우리도 불안했다고. 이제 조금 용기를 내서 그 불안의 정체를 들여다 보고 그 불안의 이유를 바꾸겠다고.

이제라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어른들부터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먼저 고백하자. 미안하다고.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 이 지경까지 되어서. 그리고 고맙다고. 꿋꿋하게 살아주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시작해주어서. 그리고 너희들과 우리는 한 편이라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