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전등사 -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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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등사 -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 이창희
  • 승인 2012.04.28 08:2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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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고찰 - 좀 더 세심하게 관리해야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 내 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진종사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계에서 발행하는 법보에 의하면 국내 최초 사찰로 전해지는 영광 불갑사(385년)보다 4년 앞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등사는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 비인 정화궁주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을 시주했으므로 절 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41년(충혜왕 복위 2) 이 절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 황흠이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 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써 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 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가 당시 총섭 초충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1761년 대연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하였다. 1784년(정조 8) 정족창이 세워졌다. 규모가 4, 5칸에 불과했으나, 1828년(순조 28)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 서룡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 규영 등이 대웅전을 중수했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포량고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와 산성별장소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

1876년에는 효월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 영담이 관음암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을 개금불사하였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을 받아 절에 내렸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을 개금하고 명부전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묵당 30여 칸을 수리하고, 식당 26칸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강설당·대조루·명부전·극락암 등을 중건하였다.

8대 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을 설립하고 안진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를 편찬, 발행하였다. 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진제목: 아름다운 나녀상>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전·적묵당·강설당·종각·대조루 등이 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반하여 돈과 재물을 모두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그 아름다운 여인은 도편수를 배신하고 그 돈과 재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그 여인에 대한 그리움과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아름다운 여인을  본 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배신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한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을 취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10구의 시왕, 2구의 귀왕, 2구의 판관, 2구의 녹사, 2구의 장군, 10구의 동자 등 29구의 존상이 있다.

이 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이 거처하는 곳으로 현재는 주지실로 대용되고 있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과 강원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범종과 법화경판이 있다. 범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 종으로, 민족항일기 말기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 빼앗겼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였으나, 1매는 6·25전쟁 때 파주 모 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또한,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대조루에는 선원보각·장사각·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러나 절 입구까지 가는 길에 나무들이 작아 2000년 고찰 같은 느낌이 덜 든다. 강화군과 전등사측에서는 큰 나무들을 좀 더 많이 심어 고찰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조치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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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2022-12-07 07:42:20
돈을 탐하여 본인을 이용했던 여자임에도... 그 여자를 잊지못하고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조각했다는 나녀상 ...애절하기도 하고 이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보물이라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네요.

竹逸者 2012-05-13 21:19:14
남자를 버리고 도망간 여자를 아름다운 여자로 표현하는건 보기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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