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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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 대하여
  • 이우재
  • 승인 2009.12.2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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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 선생님은 1957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송월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8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4학년에 재학중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됐다. 이후 1980년 계엄포고령으로, 1988년 인천 5.3사태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92년까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에서 활동했으며, 지금은 '溫故齋(온고재)'에서 논어를 강의하고 있다.






   논어에 대하여

  논어가 언제 편찬됐느냐에 대해서 현재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한(漢) 초에 이미 노논어, 제논어, 고논어의 세 논어가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논어의 편찬 시기는 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어에는 논어의 성립 시기를 알려주는 분명한 언급은 없다. 다만 태백(泰伯) 편에 증자(曾子)가 임종할 무렵의 일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논어의 성립 시기는 적어도 증자가 사망한 이후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는 『맹자』이다. 공자의 문도임을 자인한 맹자의 저서 안에는 논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에 근거하여 논어의 성립 시기를 맹자 이후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것은 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을 인용할 때 “論語曰”이라고 하지 않고, 바로 “孔子曰”이나 “子曰”, 또는 “仲尼曰”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논어의 성립 시기에 관한 정설(定說)은 없다. 다만 춘추 말에서 전국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논어가 성립되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논어를 누가 편찬했는가도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송(宋)의 정자(程子)는 논어에서 오직 유자(有子)와 증자(曾子)만을 자(子)로 칭하는 것에 주목하여 논어가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편찬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견도 많다. 송의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에 인용된 한(漢)의 대학자 정현(鄭玄)의 주장에 의하면 논어는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현재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논어가 공자의 이대(二代) 제자나 그 이후의 문인들에 의하여 편찬되었으리라는 것뿐이다. 
 
  인쇄술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 책은 필사(筆寫)나 구전(口傳)을 통하여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책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당연히 많은 이본(異本)들을 낳았다. 논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漢) 초기에 세 종류의 논어가 있었다. 이른바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논어(古論語)가 그것이다. 노논어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를 중심으로 전해지던 것으로 도합 20편(編)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논어의 편제(編制)는 이 노논어를 따른 것이다. 제논어는 지금의 산동성 일대인 제나라의 학자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것이다. 도합 22편으로 문왕(問王), 지도(知道)의 두 편이 더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장구(章句)도 노논어보다 많았다고 한다. 고논어는 한(漢) 대에 공자의 구택(舊宅)을 허물다 그 벽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堯曰)의 제2장 “子張問於孔子曰” 이하를 별도로 자장(子張) 편(編)으로 독립시켜 결국 자장 편이 둘 있는 21편이다. 고문(古文) 즉 옛 글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여져 있어 고논어라고 한다. 현재 이들 세 논어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의 성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한 성제(成帝) 때의 인물인 장우(張禹)는 본래 노논어를 전수받았으나, 제논어의 좋은 점도 취하여 자기나름의 논어를 만들었다. 그가 안창후(安昌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 논어를 장후론(張侯論)이라 하는데, 세상에서 귀하게 여겼다. 또 한(漢) 말에 정현은 노논어의 편장(編章)을 주로 하고, 제, 고논어를 참고하여 주(註)를 달았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위(魏)의 하안(何晏) 등이 당시 전해져 오던 여러 학자들의 좋은 점을 취하여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는 이 『논어집해』를 따른 것이다. 장후론과 정현의 논어 또한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필자가 논어에 대하여 글을 쓰고 있던 중인 99년 5월 22일 동아일보에 BC 55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논어 죽간(竹簡)본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중국 하북성 팔각랑(八角郞) 촌에서 농민들이 수로공사를 하던 중 한 무덤에서 죽간을 발견하였는데, 그 내용이 논어라는 것이다. 그 무덤은 BC 55년 사망한 제 6대 중산왕(中山王) 유수(劉修)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무덤의 죽간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논어가 된다. 중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기대된다.
 
  논어가 전해지는 과정이 이와 같았던 만큼 논어에는 앞뒤의 문맥이 이어지지 않는 곳이 상당히 있다. 앞이나 뒤의 문장이 빠진 곳으로 추측되는 곳도 있고, 공자나 공문(孔門)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되는 글도 있으며, 무슨 뜻인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문장도 있다. 물론 전해지는 과정에서의 착간(錯簡)이나 누락 때문으로 추측되나, 때로는 의도적인 조작의 가능성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 만큼 논어 장구(章句)의 해석도 다양하여 그야말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할 만큼 많은 주석서(註釋書)가 발간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하에서는 논어의 중요한 주석서에 대해 개괄해 본다.  
 
  1) 하안의 『논어집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존하는 최고의 논어 주석서이자, 논어 텍스트이다. 하안 혼자 쓴 것은 아니며 손옹(孫邕), 정충(鄭沖), 조희(曹羲), 순의(荀顗) 등도 함께 관여하였다. 그 시기는 대략 위나라 정시(正始) 년간(240~254)으로 추정된다. 한(漢)의 공안국(孔安國), 포함(包咸), 주씨(周氏), 마융(馬融), 정현(鄭玄), 위(魏)의 진군(陳群), 왕숙(王肅), 주생렬(周生烈周生烈周들이 소개되어 있다. 하안 자신이 직접烈周를 단 것도 있으나, 그 자신이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하였기 때문에 자설(自說周生烈경우에는 노장 사상生烈흔적이 엿보인다. 논어生烈周 중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주(古注)라고도 불리운다. 신주(新注)라고 불리우는 주자의 『논어집주』가 나오기 전까지 논어를 읽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이었다.
  
  2)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
  6세기 전반인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의 인물 황간이 하안의 『논어집해』를 재주석한 것이다. 하안 이후 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주석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황간 자신이 유학자이면서 불교 신봉자이기도 한지라, 노장 사상과 불교의 영향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또한 기이하고 재미있는 해설이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어,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으나,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이 중국에 다시 역수입돼 청(淸)의 건륭(乾隆) 년간에 복간되었다.
 
  3)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
  하안의 『논어집해』를 북송(北宋) 초에 형병이 재주석한 것이다. 원래 이름은 『논어정의(論語正義)』이나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안에 포함되어 있어 『논어주소』라고도 불리운다. 경전의 권위적 해석에 충실하여 특별히 새로운 주장 등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4) 주자(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注)』
  중국의 유학은 한 대 이래 고전의 해석에 충실하였다. 이른바 훈고학(訓古學)이다. 그러나 북송(北宋) 중기 이후 새로운 유학의 기풍이 등장한다. 이른바 도학(道學), 이학(理學), 또는 그 완성자의 이름을 따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리우는 성리학(性理學)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들은 유학을 새로운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우주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려고 한 이 새로운 유학은 이정자(二程子)라고 불리우는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거쳐 주자, 즉 주희(朱熹)에 의해 완성된다. 
 
  주자는 자신의 학문의 법통을 공자에서 증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로 이르는 계보에서 찾는다. 주자는 논어, 『맹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따로 사서(四書)라고 불렀으며, 오경(五經)보다도 중요시하였다. 주자에게 공자는 인류 최대의 성인이었으며, 당연히 그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또한 최고(最高)의 책이었다. 그런 주자가 논어를 자신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자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그의 『논어집주』 또한 논어의 가장 뛰어난 주석서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주에는 공자를 지나치게 성인시하고, 또 자신의 성리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원문을 무리하게 해석하는 등 결점도 적지 않다. 주자의 『논어집주』는 고주, 즉 하안의 『논어집해』와 대비하여 흔히 신주(新注)라고 불리운다. 이후 신주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논어에 관한 일종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져 왔다.  
 
  5) 유보남(劉宝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
  남송(南宋) 이래 4~500년을 넘게 중국의 학계를 지배한 성리학은 청(淸) 대에 이르러 학자들의 집단적인 반발에 직면한다. 청의 학자들은 성리학에 대항하여 실증적인 고증학(考證學)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주자의 신주에서 이(理) 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부정하고, 고대의 음운학이나 언어학을 연구하여 고전을 당시의 뜻 그대로 읽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청 대 고증학의 연구가 총 집대성된 것이 유보남의 『논어정의』다. 유보남은 고주, 즉 하안의 『논어집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유(漢儒), 송유(宋儒)를 비롯하여 명(明), 청 대 학자들의 장점을 모두 섭렵하고 있다. 가히 전통 시대 논어 연구의 최정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책 전부를 유보남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유보남이 집필하다 중도에 그만둔 것을 아들 유공면(劉恭冕)이 계속하여 동치(同治) 5년인 1866년 출판하였다.    
 
  6)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논어 해석은 주자의 신주(新注) 일색이었다. 주자학이 국교이다시피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실학(實學)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세운 실학자들은 당시 청의 고증학에 눈을 돌려 경전을 재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소산으로 나타난 것이 다산의 『논어고금주』다. 다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답게 논어에 관한 고금의 주를 두루 섭렵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청 대의 학자들과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다.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1812년 다산의 나이 52세 때 유배지인 강진의 초당에서 쓰여졌다.
 
  이외 논어의 주석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나, 그 중 일본의 이또진사이(伊藤仁齋)의 『논어고의(論語古義)』, 오규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도 눈여겨 볼 만한 책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논어를 연구한 책으로는 중국의 조기빈(趙紀彬)의 『논어신탐(論語新探)』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反논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나온 책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교조주의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또 중국의 정수덕(程樹德)의 『논어집석(論語集釋)』은 논어의 각종 주 중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집대성한 책으로 논어의 여러 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필자도 이 책의 신세를 많이 졌다. 
 
  논어의 주석서는 아니지만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도 논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기(傳記)이기 때문이다. 다만 크릴(H. G. Creel)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몇몇 부분의 신빙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크릴이 쓰고 이성규 교수가 번역한 『孔子 ― 인간과 신화』도 논어를 읽는데 여러모로 많이 도움이 된다. 저자는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공자에 관한 여러 잘못된 전승(傳承)을 비판하면서 공자를 합리주의자로 재정립하고 있다. 
 
  아울러 이 책에서의 논어와 『맹자』의 편장(編章)의 구분은 주자의 『논어집주』, 『맹자집주』를 따른 것임을 부기해 둔다.


  오늘 우리에게 공자는?

  논어 자장(子張) 편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이미 그의 일대(一代) 제자들로부터 해와 달과 같은, 인간이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존재로 추앙받고 있었다. 몇 세대 후의 인물인 맹자에 이르러서도 그와 같은 존경심은 변함이 없었다. 이후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공자는 중국이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인류가 태어난 이래 최고의 인간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런 인물은 다시 태어날 수 없는 지고의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전통 시대 우리의 학문 세계는 공자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었다. 공자의 말은 결코 시비가 허용되지 않는 금과옥조(金科玉條)였으며, 모든 학문적 논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궁극적 판단 근거였다. 공자의 말에 거역하는 주장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공격받았고, 자칫하면 목숨까지도 잃을 정도였다. 이것은 학문의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이었다. 전통 시대 동아시아에서 공자는 중세 시대 서양의 예수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화권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으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했다. 동도서기(東道西器) 류의 동아시아 전통 가치(유교)를 기반으로 하여 서구의 기술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개혁 운동은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서구 제국주의 침략 앞에서 동아시아적 가치 즉 유교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단말마적 몸부림에 불과했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동아시아 문화권을 대표하는 한국, 중국은 결국 식민지나 준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동아시아가 근대화 동아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를 동아시아 사회의 낙후성에서 찾았고, 민지히 동아시아 사회의 정신 세계를 지배해 온 공자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 공자는 낡은 것, 비생산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 반동적인 것의 표본이 되었다. 많은 사상가들이 공자로부터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공자에 대한 비판은 근대적 지식인이 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었다. 공자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대신 서구적 가치가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발흥과 중국의 공산 혁명도 바로 이러한 흐름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IMF사태 이후 공자는 또 다시 새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3~40년 간의 동아시아권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의 원인을 많은 서구 학자들은 동아시아적 가치에서 찾아 왔다. 특유의 근면성과 높은 교육열, 공동체적 유대감, 개인적 이익보다 공동선을 우선시하는 태도, 지도자의 솔선수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 등이 그들이 말하는 동아시아적 가치의 내용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경제 위기 이후 그들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전통 가치가 오히려 경제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족주의에 따른 족벌식 경영, 경직된 관료제, 인정주의에 따른 부정부패의 만연,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데 따른 창의성의 부족, 합리적 정신의 결여 등이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공자로부터 비롯된 유교가 비약적인 경제 성장도 가져왔고, 또 경제 위기도 불러왔다는 것이다. 수긍이 가는 점도 없지 않으나,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분명 무리가 많다.   

  공자는 경제 성장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경제의 양적 성장보다는 부의 공정한 분배에 관심이 있었고, 인간이 경제적 이해를 놓고 경쟁하는 사회보다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사는 사회를 추구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기적이라고 단정하면서, 그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의 오묘한 조화에 의해 결국 모든 인간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는 자본주의의 주장은 논어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공자의 말과 합치되지 않는다. 논어에서 보이는 공자는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자본주의적인 사람이다. 그런 공자를 놓고 동아시아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했다가 또 이제 와서 경제 위기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언제 공자가 부정부패를 묵인했고, 언제 폐쇄적인 족벌주의를 주장했으며, 또 언제 관료주의를 옹호하였단 말인가? 논어의 어디에 그런 주장이 실려 있단 말인가? 

  공자에 대한 비판의 상당 부분은 공자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공자는 누구보다도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 고대의 시기에 주술적 세계관으로 해방되어 인간의 일은 인간의 책임 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자기의 목숨을 늘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조차 거절한 사람이다. 당시  누가 있어 이보다 더 합리적일 수 있었을까? 공자는 가족의 질서를 중시하였으나, 내 아버지가 귀하면 남의 아버지도 귀하게 여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말하는 인(仁)이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도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보다 더 현실적인 박애주의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그는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남을 가르치는데 있어 사람 차별도 하지 않았다. 고대 계급 사회에서 이보다 더 혁신적인 주장과 행동이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그의 주장에 시대착오적인 것도 있고,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볼 때 지나치게 고루한 면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공자를 어느 한 면만 갖고 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느니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다. 공자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이다. 그가 아직도 인류의 사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도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공자를 부인하던 부인하지 않던, 오늘 우리의 삶은 아직도 공자의 영향 아래 있다. 불효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다. 실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돈에 대하여 의연한 척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이다. 원리원칙을 따지는 사람보다는 너그러운 사람이 더 존경을 받는다. 예절은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며, 감정에 솔직한 사람보다는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인품있는 사람으로 존경받는다. 서양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말이겠지만,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은 칭찬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똑똑한 사람이란 말보다는 어진 사람이란 말을 더 ã 서좋아하며,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똑같이 취급받는다. 배운 사람은 세상에 나아가 만백성을 위해 봉사할 의무가 있으며,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 이렇듯 공자가 우리의 삶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런 공자를 우리의 삶으로부터 배제하려는 것은 무의미한 짓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正體性)까지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공자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 우리에게 공자가 절실한 것은 그가 그토록 주창했던 인(仁)이라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더더욱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전세계를 무한경쟁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국가간, 개인간의 전면적인 생존경쟁이 전개되고 있으며,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은 사정없이 도태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근대 서양이 그토록 많은 희생을 지불하고 쟁취했던 가치이건만 경쟁이란 미명 하에 빛바랜 깃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거대한 60억 공동체는 공동체란 허울 뿐, 서로간 물고 물리는 전쟁터로 화하였다. 모든 인간은 서로에 대해 적이 되고 말았다. 이 인간들을 사랑으로 묶어 줄 끈은 없을까?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필자는 공자의 인(仁)이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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