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형식으로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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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형식으로 될 때
  • 공주형
  • 승인 2012.06.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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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공주형 / 미술평론가, 인천대 초빙교수

18세기 영국 귀족의 거실. 반짝이는 액자로 치장한 그림이 벽면에 가득합니다. 꽉 찬 것은 대가들의 그림만이 아닙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듯 한껏 차려입은 이들이 공간에 들어찼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날입니다. <계약 결혼>을 위한 협상이 있는 날이거든요. 당시 영국은 산업화의 진전으로 경제력을 갖춘 신흥 부르주아가 양산되던 때이었지요. 경제력을 갖춘 중산층의 무기는 막강한 경제력이었고, 절실한 꿈은 신분 상승이었습니다.

몰락한 귀족과 사돈 맺기는 꿈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결혼의 성립 조건은 양쪽 집의 이해관계입니다. 그러니 신랑과 신부가 서로 사랑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호가스,  <결혼 계약>, 1743

협상 테이블은 그림 오른쪽에 마련되었습니다. 금으로 수놓은 붉은 장식 옷을 차려 입은 신랑 아버지는 아들 몸값을 어떻게 올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습니다. 양피지로 만든 가문의 족보입니다. 거드름을 섞어가며 그는 아마 지금 자신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설명 중이겠지요. 그 모습을 신부의 아버지가 예의주시합니다. 금화와 지폐가 수북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예비 사돈과 마주 앉은 그는 얀경도 고쳐 쓰며 협상에 집중, 또 집중합니다. 혹여 지금 <결혼 계약>이 손해 나는 장사는 아닌지 그의 머릿속도 이해득실을 따지는 셈으로 분주합니다.

<계약 결혼>에서 신랑과 신부 아버지는 서로에게 더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키고자 여념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에 비해 그림 왼편의 당사자들은 결혼 자체에 관심조차 없는 태도입니다. 나란히 앉아 있기는 하지만 아예 등을 돌린 채 그림 속 남녀는 다른 곳을 응시하는군요. 게다가 예비 신부의 호감은 옆쪽에 서 있는 변호사에게 있는 듯합니다.

이런 계약 후 결혼 생활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궁금해 할 필요 없습니다. <계약 결혼>은 6점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는 영국 화가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의 결혼풍속도 중 첫 번째 그림입니다. 그러니 다른 다섯 점의 그림을 살피면 됩니다. <계약 결혼>으로 시작된 그의 결혼 풍속도는 <이른 아침>, <검진>, <여자의 방>, <은밀한 장소>등을 거쳐 <여인의 죽음>에 이릅니다. 부부로 인연을 맺었으나 남남으로 살았던 사랑 없는 계약 결혼이 몰고 온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마침내 신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이지요.

호가스, 여자의 죽음, 1743

얼마 전 국내 한 결혼정보회사가 '쇼윈도 커플'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답니다. 쇼윈도 커플은 겉으로는 잉꼬 커플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연인을 뜻하는 신조어입니다. 설문조사 결과 미혼 남녀 10명 중 8명이 쇼윈도 커플이 될 수 있다고 답변했다지요.

우리 삶 속의 수많은 형식들이 관계로 맺어지지 못하고, 관계마저 형식으로 된다면 우리들의 이야기 또한 <계약 결혼>의 결말처럼 슬픈 드라마가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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