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나전칠기'
상태바
세계 최고의 '나전칠기'
  • 이창희
  • 승인 2012.06.20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의 산수풍물] 영롱한 빛깔에 빌게이츠도 놀라

<국보140호:나전단화금수문동경>

나전칠기는 (기원전 209년) 중국 흉노족에 의해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예술성 높은 기술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술을 발전시킨 나라가 있었으니, 고려이다. 이후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중국으로 역수출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등의 나라에도 우리의 문화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수출을 해오고 있다. 한국을 방문한 빌게이츠도 “이런 영롱한 빛깔은 처음 보았다”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비록 시작은 중국에서 하였으나 더욱 발전시켜 우리 문화로 한류가 된 나전칠기야 말로 한류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나전칠기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중국(송나라)의 경우 무늬가 없는 단색의 칠기였고, 일본의 경우엔 칠로 무늬를 그리는 칠화로서, 두꺼운 자개를 이용하였다. 하지만 모두 단조롭거나 발전이 미약하여 크게 쇠퇴하면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경우 이웃 나라에 그 우수성을 알리게 된다.

고려문화의 한 부분이자 뛰어난 독자성으로 인해 고도로 발달된 제작기술로서 명품이라 불린 나전칠기 한류화가 최고라고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 예로 11세기 고려조정이 중국왕실에 나전칠기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동국문헌비고에 언급되어 있으며, 12세기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의 선화봉사고려도경 기록에 고려나전칠기의 발달된 제작기술이 실려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고려시대 최고의 도자기인 상감청자 기술이 바로 이 나전칠기 상감기법에서 발전되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한다. 그만큼 명품이라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목칠공예 가운데 가장 이채롭게 발달한 것은 나전칠기이다. 고대 한국의 칠공예품으로서 가장 뚜렷한 예는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목심칠가면, 또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출토된 목심과 협저로 된 채화칠이배 등 일련 칠공예품이다. 모두 삼국시대 칠공예 양상을 전해주는 유물이다. 이들 삼국시대 칠공예품이 보여준 기법은 그 기명제식과 더불어 중국 한 ·육조시대 양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칠공예품은 현재 분명한 예는 없으나 《삼국사기》에 칠전이라고 하는 관청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영의 칠공품제작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나전칠기 본산인 한국나전칠기 공예는 중국 조칠 기법의 척홍칠기로, 일본에서는 칠회기법의 시회칠기로, 한국에서는 자개를 상감하는 나전칠기로 각기 그 특색을 보아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전칠기의 '나'자는 바다조개의 “소라”(진주)라는 뜻이며, '전'자는 보배롭게 “꾸며”의 뜻이고 '칠'자는 “옺칠하다”라는 뜻이며 '기'자는 소중함을 담는 “기물”이라는 뜻이다.

나전칠기는 섬세함과 신비스러움으로 오랜 세월 우리 고유의 공예품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칠흑 같은 칠 바탕에 진주 빛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는 자개의 섬세한 무늬효과를 가진 나전제품은 천연나무와 깊은 바다에서 자생하는 전복, 소라와 목재, 장석, 기타 각종 재료를 이용하여 만드는 반복적이고 정밀한 세공작업과 복잡한 칠 과정을 필요로 한다.

나전칠기는 잘 건조되고 고운목재(고사목)를 이용하여 물건 모양을 제작한 뒤(일명 백골이라고도 함) 여기에 헝겊과 여러 가지 재료를 첨가하여 옻칠 혹은 카슈칠을 한 후 전복, 소라, 진주, 조개들의 자개를 갈고 세공하여 수놓은 제품을 통틀어서 나전칠기라 한다.

하나의 완전한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3~6개월의 기간이 걸린다. 나전칠기에 사용되고 있는 옻칠은 칠중에서 가장 강하고, 그 수명 또한 영구불변이다.

한국의 나전칠기 기원을 살펴보면 옛 낙랑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증과 유물에 의하면 7~10세기의 통일신라시대에 나전칠기가 성행하기 시작하였으며, 11세기인 고려 문종 때 조정에서 나전칠기 제품들을 제작할 수 있게 공방제도를 두어 운영하였고 이곳에서 제작되는 나전칠기들은 외국 사신들이나 왕에게 선물로 보내졌다고 한다.

나전칠기 제품이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시기는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재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께서 통영에 13공방을 두면서 일반서민들도 나전칠기 제품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다. 통영이 나전칠기 제품의 생산지로 된 것은 남해안 맑은 물에서 생산되는 전복껍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색깔이 오색영롱하여 검은 칠 바탕에 아주 잘 어우러져 고급가구를 많이 생산하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 독일, 미국, 영국, 화란 등지 박물관에 소중히 소장되고 있는 것들은 그 당시 선물로 보내졌던 것으로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나전칠기 공산품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나전칠기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인간문화재 7명과 무형문화재인 지방 인간문화재 5명이 있다. 이들의 기법을 계승하기 위해 많은 이수자가 연마하며 전국에 20만여 나전칠기 기예인들이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외세 영향으로 많은 변화를 거친 한국의 문화와 예술 중 커다란 변화 없이 그대로 계승되어 온 나전칠기는 이제 국민에게 민족공예로 추앙받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