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고인돌 -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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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고인돌 -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
  • 이창희
  • 승인 2012.07.0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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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대한민국은 '고인돌 왕국'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이르면 원시 농업 경제 사회라 이름할 만한 단계의 청동기시대가 시작된다. 농업과 목축업을 생활화한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구리를 주 원료로 주석이나 아연을 섞어 만든 청동기를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농경의 발달로 인한 잉여 생산이 생기면서 사회집단 내부에는 다스림을 받는 자와 다스리는 자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청동기를 사용하는 우세한 지위를 가진 권력자도 나선다.

청동기는 대부분 ‘지석묘’라 불리는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무덤 속에는 주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기도 하므로, 무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된다.

더군다나 고인돌은 박물관의 전시실이 아닌 자연 현장에서 뚜렷하게 대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고인돌은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실로 ‘고인돌 왕국’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남한에서 약 3만여 기, 북한에서 약 1만 기에서 1만 5천 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세계 고인돌의 40퍼센트 이상에 해당하는 수이다.

고인돌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워낙 흔하다 보니 단순한 바위덩이와 구분하기도 힘들어서 무심히 지나치곤 했다. 또 농부들이 논밭을 갈다가 거추장스러워 들어내거나 부수어 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훼손된 것도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주로 서해안 지역, 그 중에서도 호남지방에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호남지방에서 발견된 것만 해도 2만여 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은 보존 상태가 좋고 밀집도 측면이나 형식의 다양성 면에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생김새는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대개의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얹어 만든다. 무덤방의 위치나 형식에 따라 고인돌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덮개돌의 형태에 따라 크게 ‘탁자식’과 ‘바둑판식’(기반식이라고도 함), ‘개석식’, ‘위석식’으로 나눈다.

화순 효산리 고인돌 채석장. 이곳 산 정상 부근에는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있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나 고인돌 축조에 따른 과정까지도 한눈에 알 수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잘 다듬은 판석 3~4매를 땅 위에 고임돌로 세워 돌방을 만들고 주검을 놓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고, 바둑판식 고인돌은 땅 아래에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어 주검을 묻고 땅 위에 고임돌을 낮게 놓은 상태에서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다.

바둑판식 고인돌과 비슷하지만 고임돌 없이 덮개돌만 얹은 것이 개석식 고인돌이다. 위석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고 여러 매의 판석이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 세워진 형태로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만 보인다.

덮개돌은 생김새와 크기도 다양하고 무게도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이를 만큼 다양하다. 고인돌의 덮개돌 무게는 보통 10톤 미만이지만 대형의 고인돌은 20~40톤에 이르며, 심지어 100톤 이상도 있다. 이러한 고인돌을 축조할 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덮개돌의 채석과 운반이다. 덮개돌은 주변 산에 있는 바위나 암벽에서 떼어낸 바위를 이용하였다.

실험고고학에 의하면 탁자식 고인돌의 경우, 덮개돌 1톤의 돌을 약 1.5킬로미터 옮기는 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톤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데 200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이르는 고인돌을 세우려면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고, 오늘날과 같은 중장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거대한 고인돌을 세웠을까?

우선 쓸 만한 돌을 찾아내거나 커다란 암반에서 떼어내는 방법으로 석재를 구한다. 암반으로부터 떼어낼 때에는 바위 결을 따라 난 조그만 틈에 깊은 홈을 파서 나무말뚝을 막고 물에 적시는 방법을 택한다. 이렇게 하면 물에 불어난 나무가 바위를 쩍 하고 가른다. 떼어낸 돌을 운반하는 작업은 큰 통나무 여러 개를 깔아놓고 옮긴다.
 
땅을 파서 고임돌을 세운 뒤에는, 고임돌의 꼭대기까지 흙을 쌓아올려 경사가 완만하게 둔덕을 만들고, 둔덕을 따라 덮개돌을 올린 뒤, 흙을 치우면 고임돌 위에 덮개돌이 얹힌다. 고임돌과 덮개돌로 인해 생긴 공간에 주검과 부장품을 넣은 후 편편한 돌판으로 막으면 모든 과정이 마무리된다.

물론,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인돌을 세웠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이 밖에도 고인돌의 축조기술은 암벽에서 돌을 떼어내는 고도의 기능을 가진 석공이 필요하며, 이를 좀 더 쉽게 운반하고 받침돌 위에 정확하게 올리는 토목설계의 기술을 요한다. 엄청난 무게를 가진 고인돌의 축조는 많은 상상력과 불가사의한 의문을 갖게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전인 1992년경의 고창 죽림리의 고인돌군. 정비된 지금과는 달리 계단식 논 위로 100기가 넘는 고인돌이 펼쳐져 있어 또 다른 장관을 연출했다.

탁자식 고인돌은 주검이 땅 위에 놓이므로 고임돌 위에 덮개돌을 얹어야 하는 수고가 들지만, 고임돌이 작거나 없는 개석식 고인돌의 경우에는 덮개돌을 운반하여 땅 위에 놓으면 작업은 끝난다.

작업량으로 보아 더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어야 세울 수 있는 탁자식 고인돌을 세운 집단이 사회적으로 좀 더 우세하였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고임돌이 작거나 없는 고인돌의 경우에는 부장품이 단출하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탁자식 고인돌은 대부분 한반도 중부 이북에서, 고임돌이 작거나 없는 고인돌은 전라도나 경상도를 비롯한 남부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리하여 탁자 모양의 고인돌을 북방식, 바둑판 모양이나 고임돌이 없는 방식의 고인돌을 남방식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고창 고인돌은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와 상갑리, 도산리 일대에 무리지어 있다. 죽림리와 상갑리 일대의 고인돌은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산기슭을 따라 447기가 약 1.8킬로미터나 이어진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고인돌이 가장 조밀하게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각종 형식의 고인돌과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모두 모여 있는 것도 고창 고인돌의 특징이다. 고창 고인돌 대부분이 바둑판식인데, 도산리 지동마을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은 남쪽 한계선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고창 매산리 고인돌. 고창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둑판 모양의 거대한 고인돌이다.

고인돌에서 이렇다 할 만하게 권력을 상징할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고인돌은 당시 일반적인 무덤양식으로 남녀노소,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나 묻힐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기원전 400~500년 무렵 낮은 야산과 농사짓기 좋은 고창 지역에 터를 잡았던 사람들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되지만, 그렇더라도 청동기를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차는 엄연히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들의 가족 무덤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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