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영원히 사는 '푸른솔' 박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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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영원히 사는 '푸른솔' 박영근
  • 이장열
  • 승인 2012.08.19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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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 부평 신트리공원에서 박영근 시비 제막
2002년 부평4동 집앞에서 박영근 시인(사진제공: 시인의 미망인 성효숙 화가)

취재: 이장열 기자

"밤새 몰래 밭둑을 더듬고 간 여우비에
과부 한숨이 벙글었네
 
비바람에 꽃이 진들 어떠리
애호박 따는 손이 첫서방 보듯 떨리었구나. "<호박꽃>
                 
시인 박영근!
 
그를 불러 보지만, 이승에서 만날 수 없다. 2006년 5월 11일 이승과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1980년대, 그 시대정신과 비켜서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서 사람들의 해맑고 올곧은 서정성을 자신의 몸으로 지독하게  뿜어낸 이가 시인 박영근(1958-2006)이다.
 
"큰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살아낼 것이고, 살기 위해 노력을 할 텐데요. 그렇다면 시는 쓰게 될 것이구요. 저에게는 버틴다, 버티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고 살아내야 한다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문예진흥원 강연회 답변에서, 2004. 5. 7)
 
시인을 주검으로 몬 폐결핵은 영양 결핍에서 온다.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에너지를 남김없이 문학과 문학정신에 쏟아붓고 지독스럽게 시에 투영하고 죽음을 맞이한 우리 시대 참다운 지식인이었다.
 
2012년 9월 1일 토요일 오후 3시 부평 신트리공원에서 열리는 박영근 시비 제막식. 1980년대 우리 현대시사에 한 골을 구축한, 이른바 '노동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평가, 그리고 세밀한 접근이 이뤄질 시발점이라는 점과 아울러 처음 인천에 시비가 세워지는 일이라 더욱 뜻 깊다.
 
박영근 시인은 "'노동해방문학' 같은 거창한 것엔 별로 관심 없습니다. '노동자 정권'을 만들려는 전투적 노동운동도 현장의 정서와 너무도 괴리된 구호였습니다."고 일간지 인터뷰에서 지적할 만큼 자신의 시적 지향은 관념성이 아니라, 역사성을 담고 있는, 몸으로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이 진실성에 다가설 수 있다고 확신한 시인이였다.
 
"지금 진실이 이렇게 저렇게 비틀려 있다, 혹은 훼손돼 있다. 그러므로 다른 세계가 와야 한다는 쪽보다는 차라리 그렇게 비틀려져 있고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있는, 그 자체가 되고 싶은 충동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문예진흥원 강연회 발언, 2004년 5월 7일)
 
"타락한 현실의 모습이 어떤 관념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구체적 형상으로 드러나겠지요. 저는 도리어 혼란스러운 현실의 생생한 일부분이 되기를 원합니다."('현실의 고통과 메시지', 2005. 3. 디카데미 사이버 토론회에서)
 
그는 시인이 서 있을 자리를 분명하게 인식했다.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적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머리 속에서 아니라, 현실에서 실천했다는 점이 여느 동시대 시인들과 다른 지점이었다.  
 
그는 늘 '주변부'에서 서정은 발현한다고 보았다. 박 시인이 "시의 뿌리는 1980년대 노동현장"이라고 말한 바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박영근 시인은 전통적 서정성을 이어받아 당대의 시대정신을 자신만의 호흡으로 노동현장과 시민 삶의 애환과 아픔, 고통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1980년대 여느 시인과 앞 세대 시들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서정을 드러냈다는 점이 앞으로 한국 현대시사에서 시인 박영근이 우뚝 자리를 마련할 유별성이다.
 
한국 현대시사는 시인 박영근을 1970년대 시인 김수영이 그렇게 우리들에게 외쳤던 '자유'와 남도의 '저항성'을 고스란히 자신 몸에 체화한 시인으로 기록할 것이다.
 
이처럼 시인 박영근 시비가 시인이 떠난 지 6년 만에 시인에게 '문학의 고향' 부평에 세워진다. 속절없이 떠나보낸 이들의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돌에 새겼다.
 
2012년 1월에 '고박영근시비건립위원회'(회장 정세훈)가 구성된 뒤 박영근 시인을 기리는 전국 문인 선후배들, 그의 벗들, 그리고 인천 노동계 벗들의 성금과 부평구가 시비 부지를 제공하는 도움에 힘입어 시비 제막에 이르게 됐다.
 
시비 앞면에는 박영근의 시 '솔아 푸른 솔아-백제 6'가 새겨진다. 시인이 남긴 육필원고에서 글자체를 따 왔다. 시비 뒷면에 시인의 약전과 건립문이 새겨진다. 박영근 시인의 약전은 서홍관 시인이 썼고, 건립문은 박일환 시인이 마련했다. 시비 디자인은 김환영, 성효숙이 맡았다.
 
'솔아 푸른 솔아' 가 시비건립위원회에서 여러 사람 의견을 모아서 가장 많이 선택되어 선정했다고 위원회 관계자는 밝혔다.  
 
이날 제막식에는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이시영 시인과 현기영 소설가 등과 인천지역 문인, 그의 벗들, 부평구 관계자, 유족 등이 한데 모여 빼어난 시적 성취를 거두고 요절한 박영근 시인이 남긴 발자취를 새삼 기억한다.
 
박영근 시인은 1974년 전주고 1학년에 다니다 '문학'을 하기 위해 가출해 서울로 올라온 뒤, 신정동 뚝방촌과 이곳 저곳 공장 노동자로 떠돌다가, 1985년에 서울 구로에서 인천 부평으로 왔다. 시인의 생애 반을 붙박고 살았던 데가 부평이다.
 
25년간 부평에서 살았던 곳에서 마지막 생도 마감했다. 그의 시 <물의 자리>에서 '내려 앉고 싶다'고 속내를 드러낸 데가 바로 부평인 만큼 그의 시 창작 산실인 셈이다.
 
박 시인은 한 곳에 머물고 싶은 욕망을 표현했다. "스물 다섯 계급장을 떼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취업 공고판 앞에서’, 1983)고 절망했던 시인이 아니었나. 자기를 낳아준 전북 부안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던 그는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그 현실의 고통과 마주서는 결연함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고스란히 받아낸 시인이기 독보적인 서정을 우리들에게 안겨줬다.
 
인천 부평으로 박영근 시인이 오게 된 것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고 시인의 미망인 성효숙 화가는 말했다. 부평은 운명의 마지막 기항지로 시인에게 남게 됐다. 시인의 발걸음이 숱하게 찍혀 있는 부평 신트리공원 한자락에 시비가 세워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평동에서 25년간 산 시인은 동네 아저씨 '박씨'로 불리며 살았다. 시인이  드나들었던 동네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사오다 마주친 동네 사람들,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이 시인에게 사람의 정과 장소의 포근함을 함께 느끼게 해줬던 안식처였다.
부평 4동 생전에 박영근 시인이 살았던 집 
시 '낡은 집'에 나오는, 시인이 죽기 전까지 살았던 부평 4동 주소지를 기자는 찾아 나섰다. 한적한 골목길 사이로 낡은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 왔다. 현대식 빌라에 끼여 아직 남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기와지붕 위로 호박넝쿨이 자라고, 청색 철문은 열린 채다. 현재 사람은 살지 않았다.
 
박영근 시비가 세워질 부평 신트리 공원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시인이 죽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금방이라도 청색 철문으로 삐거덕하며 열리며 시인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골목 들머리에 자리잡은 세탁소에서 "박영근을 아느냐"고 물었다.
 
"내외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늘 마주쳐서 알고 있다, 몇 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다. 뭐 모르겠지만, 늘 외로워 보였다."
 
동네 세탁소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25년 동안 세탁소를 경영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외로운 사람으로 아직 기억하고 있다. 세탁소에 드나드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몇 년 전에 '박씨가 죽었다'는고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동네 사람들은 시인을 박씨로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일흔을 훌쩍 넘은 세탁소 주인은 박씨가 세탁소에 옷을 맡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전했다. 늘 같은 옷에 늘 그렇게 혼자 지냈던 것 같다고 귀뜸해줬다. .
 
박영근 시인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갈구한 것은 '자유'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어느 누구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를 갈구했기에 그는 지독한 외로움으로 밀고 들어간 것이다. 그 질퍽한 어둠 속에서 빼어난 절창의 서정시들이 잉태되어 나왔음을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발걸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박영근 시인에게 긴 외로움 터널 끝에 운명처럼 다가온 인천 부평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부평은 시인에게 이제 고향에 진배없다. 죽어서 이제 영원한 인천 사람이 되는 시인 박영근 시비가 9월 1일(토) 오후 3시 부평 신트리공원에서 세워지기에 그 날이 기다려진다.
 
비로소 인천은 한국현대시사에 기릴 남을 시인 박영근을 얻게 됐다.  
 
부평4동쪽 골목길 어귀에서 부평 신트리공원으로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다.
 
"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줏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이사> 가운데서(계간 <리토피아> 2006 봄호)
 
 박영근 시인의 육필원고 '이사'' 일부분(자료제공:시인의 미망인 성효숙 화가)

 
<박영근 시인 해적이>  * '해적이'는 약력의 우리말
1958년 9월 3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현 변산면) 마포리 산기마을에서 부 박창기(朴昌基)와 모 이옥례(李玉禮)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64년(6세) 부안군 산내면 마포국민학교 입학.
1968년(10세)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 국민학교 5학년 때 전북 익산으로 전학함. 익산시 평화동 셋째이모 집에 거주.
1974년(16세) 익산 남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고등학교에 입학, 전주에서 하숙생활 시작함. ‘홈룸’시간에 시국에 관한 발언으로 학교에서 요주의 인물이 됨. 학교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고 고향 친구와 선배 집에서 김지하, 고은, 황석영 이호철 최일남의 작품과 『창작과비평』 『사상계』 등을 탐독함. 더이상 억압적인 학교생활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퇴. 문학을 하겠다는 꿈을 품고 상경하여 이후 1년 동안 당시 교사로 근무하던 형 박정근의 집(성동구 능동)에서 생활함.
1975(17세) 고등학생 문학써클 모임에 오봉록 등과 함께 참여하고, 전주 풍년문화원을 빌려 시화전 개최. 쏘비에뜨 혁명 등을 빗댄 창작시 때문에 경찰조사, 가택수색을 당함. 김지하의 『오적』을 소지한 혐의로 보안대에서 조사받음. 종로 보신주단을 빌려 개최한 시화전에 참여.
1976(18세) 『학원』 4·5월호에 시 「눈 1」 「눈 2」가 입선작으로 수록.
1976~78(18~20세) 종로에서 민청학련 관련인사 김기선을 만나 홍영표(이후 노동운동에 투신, 대우자동차에서 해고됨), 박형규(이후 하늘땅출판사 설립) 등과 함께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등을 읽으며 민주화운동에 관한 토론모임을 가짐.
1977~79(19~21세) 양천구 신정동 뚝방촌에서 생활.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토론 등을 통해 교류. 종로 초동교회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며 교회 내 대학회지에 시와 문학비평문 등을 기고.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해 민주화를 바라는 기독교 및 재야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함. 대학연합문학써클 ‘청청(靑靑)’에 참여해 시창작 활동을 하고, 시화전 등을 개최함.
1981(23세) 군 제대 후 민중문화운동, 민중신학, 학생운동, 기독교계 관련인사 등 각계각층과 교류하며 신촌에서 쌀가게를 운영함. 동인지 『말과힘』을 발간. 『반시(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함. 1970~80년대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성효숙을 만남.
1982~83(24~25세) 구로3공단 삼립빵공장 부근에 살면서 3공단 등지의 제본회사, 곤로회사 등에 취업. 권오광 등 학생운동, 노동운동계의 벗들과 교류함.
1983~85년(25~27세) 구로동과 철산리 산동네에서 생활하며 고(故) 조영관 시인 등을 만나고 노동운동가, 민중문화운동가 들과도 교류함. 마포 아현동 애오개소극장에서 미술동인 ‘두렁’을 비롯해 정희섭 김영철 김원호 등과 교류하면서 홍제동 성당, 성문밖교회 등에서 열린 각종 문화행사와 집회에 참여. 시국집회에서 현장시를 낭송하기도 함.
1984년(26세)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교류하며 동대문 근처에서 소모임을 가짐. 민중문화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국집회와 철야농성 등에 참여함. 신경림 임진택 정희성 김정환 이영진 하종오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창립하고 창립간사로 일함. 첫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청사 1984.6) 출간. 노동자 생활이야기를 쓴 첫번째 산문집 『공장옥상에 올라』(풀빛 1984.12) 출간. (유고시집의 연보가 잘못되어 바로잡습니다.) 이해 12월부터 1987년까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회원으로 김정환 김사인 김남일 고(故) 채광석 등과 함께 활동함.
1985(27세) 고(故) 김도연이 설립한 공동체출판사 편집위원으로 활동함. 노동문화패들과 함께 인천 5·3항쟁에 참여함. 이해 가을 근거지를 부평으로 옮긴 ‘두렁’의 성효숙과 함께 산곡동으로 이사함.
1986(28세) 강형철 김형수 이산하 안수철 등과 함께 학습소모임을 가지고 활동함.
1987(29세) 인천 보르네오가구 등에 생산직으로 취업. 유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관련 집회에 참여함. 두번째 시집 『대열』(풀빛) 출간.
1987~89(29~31세) 민중문화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 ‘두렁’과 함께 박종철 열사에 대한 영상제작에 참여함.
1989~90(31~32세)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김정환 이용배 문승현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영화분과 일을 맡음. 하늘땅출판사 편집위원, 잡지 『예감』 편집위원으로 활동함.
1993(35세) 부평 산곡동에서 부평4동으로 이사하여 2005년 11월까지 생활함. 세번째 시집 『김미순傳』(실천문학사) 출간.
1994(36세) 노동과 현실에 투철한 문학정신을 평가받아 제12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함.
1995(37세) 송성섭(풍물) 허용철(미술)과 함께 인천민예총 창립.
1997(39세) 네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작과비평사) 출간.
1998(40세) 12월 신현수 이세기 등과 함께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를 창립하고 2000년까지 부회장으로 일함.
1999~2002(41~44세) ‘인천문화를 열어가는 시민모임’ 창립회원으로 최원식 박우섭 이남희 김창수 등과 함께 활동함. 인천민예총 사무국장으로 일하며(2000~2001), 강광 이종구 등과 함께 활동함.
2002(44세) 다섯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 출간, 이 시집으로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함.
2002~2006(44~48세) 인천민예총 부지회장(2002~2005),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2004~2005),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2002~2006) 역임. 산문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출간. 2004년 8월 몽골에서 진행된 ‘한·몽 시인대회’에 이시영 고형렬 김용락 한창훈 김형수 등과 함께 참가함. 2005년 11월 인천 용현동으로 이사함.
2006(48세)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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