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진 마음 펴는 데 상실은 얼마쯤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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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마음 펴는 데 상실은 얼마쯤 될까
  • 김명남
  • 승인 2012.08.31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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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김명남 / 시인



들녘에서 벼가 고개 숙이며 여물어가고 있다. 쌀을 뜻하는 한자인 米. 농부의 손길이 여든여덟 번 닿아야만 비로소 우리들의 밥상에 올라 올 수 있다고 했던가.

뼈가 닳도록 쏟아붓는 정성과 수고로움에 맞게 수확의 기쁨도 함께 누려야 할 테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농부들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농민을 대신하여 읊다

비 맞으며 논바닥에 엎드려 김매니

흙투성이 험한 꼴이 어찌 사람 모습이랴만

왕손 공자들아 나를 멸시말라

그대들의 부귀영화 나로부터 나오나니

 

햇곡식은 푸릇푸릇 논밭에서 자라는데

아전들 벌써부터 조세 거둔다고 성화네

힘써 농사지어 부국케함 우리네게 달렸는데

어찌 이다지도 괴롭히며 살을 베껴 가는고

- 이규보, <代農夫吟二首>

  

보리죽

동쪽 집이 들들들 서쪽 집이 들들들

보리 볶아 죽 쑤려고 맷돌소리 요란하네

체질도 하지 않고 밀기울도 불지 않고

그대로 죽을 쑤어 주린 창자 채우지만

썩은 트림 신 트림 눈앞이 어질어질

해도 달도 빛을 잃고 하늘땅이 빙빙 도네

-정약용, <오거삼장熬麮三章>

 

고려 중기 문신 이규보나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시를 보면 농촌의 어려운 실상과 농민들의 피폐한 삶을 다룬 시가 꽤 많다. 그만큼 동시대인들의 아픔과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글로써 남겨둔, 시대정신에 충실한 문장가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오곡이 익어가는 농촌의 가을들녘은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나 농촌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봄에 씨 뿌리고 농사를 시작하려면 당장 가진 돈이 없기에 대부분 농협에서 농자금대출을 받는다. 가을이 되어 추수하면 애써 농사지은 것을 농협에 이자로 바치고, 농기계 대여 및 수리비, 농약값, 사료값, 종자구입비 등을 따지면 남는 것이라곤 또다시 빚이다. 1년 내내 흘린 땀이 그대로 빚으로 남는다. 빚추수이다.

정부에서 쏟아내는 농산물 가격정책이나 농촌발전정책에 농민은 없고 허울뿐인 정부만 있다. 농촌경제구조가 농민들이 대출원리금을 갚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농사가 잘 되면 풍년이라 물량이 넘쳐서 원산지 가격이 떨어지고, 태풍 등 기상악화로 흉작이면 품질이 떨어져 제대로 된 값을 받지 못한다. 흉작으로 농산물 가격이 많이 올라도 유통업자들이 농민들에게 이런저런 구실을 대면서 제대로 값을 쳐주지 않는다.

도시민들이 폭등한 농산물을 사서 식탁에 올리면서 농민들도 상승된 가격에 비례해 이윤을 얻었을 것이라 여길지 모르겠다. 이때도 생산자인 농민들에게 돌아갈 이윤은 중간유통업자들에게 돌아가는 게 농촌현실이고 유통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농민들의 삶을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는 곳이 있다. 농협이다. 협동조합은 원래 조합원들이 서로 돕고 도움 받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오늘날 농협은 농민들의 협동조합이 아니라 농민 위에 군림하고, 농민의 노동력을 소리 없이 착취하고, 농민의 삶을 야금야금 파먹을 뿐이다. 마치 옛날 백성들의 고혈을 빨며 득세하던 세리稅吏 같다.

끝으로 필자의 졸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우리 사회가 지탱할 수 있도록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일하시는 농어민, 노동자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찌그러진 마음을 펴는 데 치루어야 하는 상실은 얼마쯤 될까

 

 

동네에서 제일로 큰 건물이던 정미소 앞에

그보다 더 큰 상가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귀를 틀어막게 했던 요란한 기계소리

쌀자루 아가리로 마구 쏟아지던 하얗디하얀 햅쌀을

고이 받던 손끝의 작열

쌀내 그윽한 쌀가마를 리어카에 싣고 오던 가을은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뉴스에선 대풍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네 어른들은

매상할 때면 말짱 헛거라고 입을 모은다

농사가 잘되면 쌀이 넘쳐 쌀값이 없고

태풍이며 병충해로 흉년이 들면

매상등급이 낮아 손에 쥐는 게 없는데

대풍은 무슨 대풍이냐고

한 해 농사 돌아볼 새 없이 날아든 농협 빚독촉에

집집마다 소슬바람이 휘감고

마을은 시름빛이 깔린 겨울벌판이 된다

- 필자의 시집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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