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그 멀고도 험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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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그 멀고도 험한 길
  • 계원숙
  • 승인 2012.09.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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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칼럼] 계원숙 / 의사


<이주, 그 먼 길>. 제목이 참 시 같네. 한 일간지에서 신간 안내를 보며 하는 소리다. 책을 구해 봐야겠다고 하는 중에 친구 SNS에서 이세기 시인의 출판기념회 소식을 접했다.

스페이스빔은 처음 가보는 곳이라 텅 빈 1층 공간에 발들 들여 놓는 순간 당황했다. "어디서 모임을 한다는 거지?" 두리번거리며 소리가 나는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몇 개 테이블에 남은 자리가 없어 쪽방으로 올라가 앉았다. 얼핏 외국인들도 몇 눈에 띈다. 시인은 간략하게 자신의 약력을 소개한 후 2005년부터 '한국이주인권센터'와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활동하면서 만난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빔 프로젝트를 곁들여 들려준다. 산재와 관련해 월급이나 퇴직금 체납 문제,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이들이 어떻게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는지, 단속에 걸려 강제 출국을 당하던 기간을 마치고 자발적으로 귀향한 이들이 돌아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시 돌아간 고향에서는 그동안의 공백으로 인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인이 되거나 가정이 깨지거나 하는 현실들…. '이주노동' 속의 고통….
 
수년 전 부천 '외국인노동자의 집' 실무자가 펴낸 <말해요, 찬드라> 이후에도 이주노동자들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버마 민주화를 위한 이주노동자 조직 '버마행동' 대표 뚜라씨가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이제는 난민으로 인정되어 그나마 단속과 강제출국의 불안은 던 상태라고 한다. 귀화인 박 이스라르씨는 한국인과 결혼해 '안양 박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고물상을 운영하며 인권교육 강사로 활동 중인 이야기를 한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고 나면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의 반응이 많이 변한다고 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발표가 끝난 후 '로띠'를 구워 나눠 먹었다. 나누는 음식은 언제나 착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책 저자의 사인을 받아들고 나오는데 1시간 전 찾아 올라올 때보다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이 시대 이주민, 이주노동자 얘기는 영 남의 일 같지 않다. 오래간만에 큰 오빠집에 가서 집안 족보를 찾아본다. 수안 계(桂)씨 또한 이주한 귀화인이기 때문이다. 가계 족보에 의하면 수안 계(桂)씨가 한반도에서 살게 된 것은 시조께서 고려 공민왕 시절 원(元) 공주가 시집을 올 때 따라오면서부터라고도 하고, 혹은 명 태조 홍무 연간에 중국에서 왔다고도 한다. <한국의 귀화 성씨>라는 책에서는 고려시대 귀화 성씨 중에 수안 계씨가 나오는데, "중국 감숙성 천수지방 사람 계석손이 고려 말에 황해도에 왔다고 한다. 충렬왕(1274~1308) 때 계문비가 대장군으로 나오므로 송나라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다"라 쓰고 있다. 뼛속까지 단군의 자손이려니 하고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면서 컸는데, 귀화 성씨라니? 초등학교 시절 급우들 앞에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라는 <국민교육헌장>을 열정적으로 외우며 누구 못지않은 애국심을 외쳤는데 중국인의 뿌리라니? 한동안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이미 800여 년 전 일이니 중국에서 이주해 온 조상의 흔적은 23세손인 내게는 성씨를 빼고는 많이 희석되어 있지 않을까? 정체성 고민 없이 이제까지 산 걸 보니 아마도 그러리라. 위의 책은 통계청 보고를 인용해 2000년 11월 기준 한국의 성씨는 728개이고 이중 토착성은 286개이며 442개 성은 1985년 이후 외국인 귀화 성씨라 한다. 토착 성씨 중 146성이 외국에서 들어와 동화한 국민으로, 남한 인구 4598만여 명 중 26%인 1236만여 명이 귀화인 후손이라는 것이다. 길에서 만나는 넷 중에 하나는 나와 같은 처지라는 말이다. 이 땅의 이주와 귀화 역사는 주변 세계정세와 관련이 많다고 한다. 중국 땅에 정치적인 변화가 있을 때는 중국에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임진왜란 때는 일본인들의 귀화가 많았다고 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가야국 김수로왕도 이주민이라고 한다. 자본의 세계화 시대인 요즘은 동남 아시아인들이 주변 노동시장의 노동공급원으로 되면서 이주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또한 세계정세에 의한 현상이다.

기록적인 가뭄이 지속되던 지난달 초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주말 진료소를 꾸려가는 단체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을 방문하는 건 몇 년 만이라 혹시 이사를 하지는 않았을까 두리번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가는데, 대단지 아파트 길 건너 개발되지 않은 동네는 여전하다. 사무실은 그대로다. 마침 그 주말에 진천에서 진행할 여름 농활준비로 가뜩이나 좁은 사무실이 북적북적하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주말마다 진행하고 있는 진료소에 대해 물었다. 경인여대, 인천대, 인하대 대학생 봉사도 그대로 있고 새로운 봉사 장소를 찾고 있던 한의사. 치과의사, 양의사 선생님들이 연결되어 팀을 짜서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열정적이네. 늙지도 않냐?" 했더니 어쩐 일로 사무실엘 다 왔느냐고 묻는다. "그동안 너무 놀아서…." 했더니, 웃는다. 진료소에 매달 나올 필요는 없고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참여하면 된단다. 봉사자들이 많다 하니 이 또한 반가운 얘기다.

고용노동부 산하 고용센터가가 8월부터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알선장'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동안 이주노동자들이 구인업체의 정보가 적혀 있는 알선장을 받아 자신의 조건에 맞는 일자리를 직접 구했는데, 앞으로는 고용센터에서 구직자 정보를 넘겨받은 업체에서 걸어오는 전화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다니던 공장을 그만둔 뒤 3개월 안에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미등록자로 되어 강제 추방될 거라는 얘기란다. 아니면 미등록 이주자로 단속을 피해 다녀야 하는 불법자가 되거나…. 이에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들이 나서 '사실상 노예시장 방식의 고용'이라 비판하며 규탄집회 등을 열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저녁 시간에 동네 시장이나 대형마트에서 외국인들을 일상적으로 접한다. 대부분 이주노동자들이다. 가끔은 우즈베키스탄 식당이나 키르기스스탄 식당에서 '유목민 식사'를 맛보기도 한다. 어느새 우리 일상 중에 '그들'이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고향에서 가족을 대표해 '코리안 드림'을 안고 인천공항으로 들어오지만 기실 그 순간부터 고통의 시작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여기저기 주변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점차 그들의 사정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어느 백년 뒤 '안양 박씨' 댁 후손 모습도 그려본다.

*계원숙은 인천시 중구 용유도 출신으로 경희대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남구 용현동 김내과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수필가로 등단한 바 있고, 독도에 대한 연구와 실천 활동을 십수년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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