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과 문화적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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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과 문화적 충격
  • 김인수
  • 승인 2012.09.2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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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칼럼] 김인수 / 햇살요양병원 병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요즘 우리는 두 개의 특별한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있다. 하나는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로부터의 충격이고 다른 하나는 가수 싸이가 내놓은 뮤직 비디오 '강남스타일'의 전세계적인 인기다. 이 둘의 차이와 공통점에 대해서는 문화평론가의 전문적 해설이 있겠지만, 문외한이라도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차이는 확연할 것 같다. 마치 현 대한민국에서 공존할 것 같지 않은 음지와 양지가 세계적인 문화콘텐츠 양극화로 재생되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에 있어 상당한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와 유사한 문화적 인식의 혼란을 느낀 것이 처음은 아닌듯하다. 인도 볼리우드 영화에서 화려한 의상과 춤, 멋진 남녀의 환상적 사랑을 보여주는 반면에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갠지스강 유역의 하루 벌어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의 생활고에 관해 대조적인 현실을 보여주곤 했다. 이런 차이가 장르의 특성에서 오는 면도 있겠고, 제작자의 현실을 보는 관점과 문제의식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소위 주류문화의 컨텐츠가 대중의 관심을 환상적인 비현실적 욕구 충족에 소비하게 하는 동안 대다수 서민들 삶의 현실을 둘러싼 문화의 생산과 유통은 시들해지고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은 그늘에서 어둠으로 밀려나게 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현지 제작자의 의도와 범위를 뛰어넘어(뛰는 놈 위의 나는 놈으로서) 자본주의 본산인 미국자본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주류 문화적 코드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그동안 자본주의 변방에서 우리를 길들여 온 할리우드식 문화의 결실을 그들은 되돌려 받기를 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단적 문화의 보급과 유통을 견제 내지는 통제를 원할 것이다. 이번 자칭 B급 대중문화의 세계화는 쪼그라진 비참한 현실을 벗어 던지고 대박난 심정으로 우쭐대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 그것도 세계 물질주의의중심인 미국의 한복판에서 대한민국 만세와 함께 춤과 노래를 보여주는 환상 같은 현실을 가져온 것이다.

반면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는 물질주의 희생자들의 진혼곡이자 대중들의 참회와 용서를 촉구하면서 현 물질문명의 차디찬 심장에 단도직입적으로 단숨에 칼을 꽂아놓은 감독의 실력을 보여 준반주류적(반물질주의)이면서 (제작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작품이라 할 것이다.

영화 피에타를 보고 나오며 머리에 떠오르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뉴스에서 나오는 자살률 세계 1위인 나라, 하루 평균 44명이 스스로 죽어가는 나라, 이젠 귀에 익어서 자살이 보통(?)명사가 된 나라, 머릿속에 자살이 무엇이지 생각하다가도 화급히 외면해 버리며 살아야 하는 나라, 어느새 인가 진료실 안팎의 대화에서 어느 집의, 누가 어떻게 죽었더라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이젠 별 새로운 내용도 아니게 된 나라...

영화에서 그려진 세속의 참상을 보면서 우리가 늘 보고 듣던 “못 받은 돈 받아드립니다” 광고 현수막과 장기(臟器) 산다는 매매광고 전단지가 여기저기 붙어있던 병원 화장실, 빚 독촉에 목숨을 끊기도 하고 빚으로 인해 몸 팔고, 가정파탄에 이은 살인사건의 뉴스들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무관심하게 다른 나라인 듯 살아가야 하는 나 같은 인간들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비극적 상황이 단순히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알기에 버젓이 살아간다는 것이 죄송스럽고 그러다 못해 혐오감과 거부감마저 들지만, 다행인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 현실이 자본주의 사회의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기에 너나 나나 수치스러움을 안고 함께 살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돈이 처음이자 모든 것”이라는 영화대사에 녹아 있는 대한민국 현 사회에 대한 진단을 불편하게 받아드리거나 거부하는 사람조차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위선적인 성직자와 정치가 류들이 돈과는 상관없는 사회를 말하기도 하고 뜬금없는 상상력으로 부자에 대한 소망을 안겨주지만 그런 류의 대부분은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은폐의 수단들이며 오히려 그들 자신들의 치부와 탐욕의 기만적 수단으로 영화의 배경에는 항시 신학교와 예배당 십자가가 높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서구사회에서는 강자를 찬미하고 약육강식의 경쟁력을 부추기는 사회 이데올로기가 위기를 맞이하여 사회전반의 공멸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복지국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사회경제적 효율성을 위해 적당한 복지는 노동력의 유지와 사회안정을 위해 필수적이었으나, 탐욕은 커지고 그 방법과 방식은 광범위해지고 교묘해지면서 사회적 합의의 틀 안에 자본의 통제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은 현재의 세계 경제위기에서 더욱 증폭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이 유례없이 단기간에 이루어졌다는 찬사를 받아왔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우리가 치루어왔던 대가는 무엇이었는지 심각하게 되물어야 할 싯점이 왔다. 엄마 없는 자식으로, 영혼 없는 물질로 세상을 바라보며 커온 그 성장제일주의의 희생자들이 다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어떤 식으로 세상에 던질 것인지가 두려워지는 현실이다.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어느 정도 현실화되고 있는 것일까? 고도경제성장 신화의 대가로 치루어야 할 자비와 구원이라는 개인적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현실 정치에서의 리더십이 이 세상에서 과연 언제나 가능한 것일까?

영화 피에타가 보여주는 참담한 현실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나는 희망한다. 이미 우리는 아프고 힘들다. 그리고 분노하기에도 지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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