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구두'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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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구두'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
  • 공주형
  • 승인 2012.09.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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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공주형 / 미술평론가, 인천대학교 초빙교수

낡은 구두가 놓여 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주인과 함께 고된 시간을 함께 했는지 처음에 반듯했을 모양도 변형되었고, 표면의 윤택도 사라졌습니다. 이 〈구두〉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 ~ 1890)가 그린 것입니다. 이 낡은 구두는 누구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세 명의 철학자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반 고흐, 〈구두〉

하이데거는 이 신발 주인으로 촌 아낙네를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구두에 서려 있는 많은 것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를테면 〈구두〉에 '넓게 펼쳐진 밭고랑을 걸어가는 아낙네의 강인함,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이데거가 한 켤레의 〈구두〉를 통해 만난 것은 촌 아낙네가 속한 세계였지요.

그런가 하면 사피로는 화가가〈구두〉주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반 고흐가 농촌이 아닌 세계의 도시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지요. 또한 진흙 범벅의 다 닳아 헤진〈구두〉의 불량한 상태도 반 고흐 전문 연구가답게 놓치지 않았습니다. 화가는 여러 점의 신발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는 주인이 농부로 명확한 그림도 있었지요. 그 경우 화가는 농부의 신발을 깨끗한 새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근거를 토대로 사피로는 이〈구두〉가 세상의 외톨이로 살다 간 반 고흐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 화가의 자화상이라 덧붙였답니다.

그렇다면 이〈구두〉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데리다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림 속 신발은 끈이 풀린 채 벗겨져 있습니다. 과거에 누군가 이 신발을 신었을 것입니다. 촌 아낙네가 신었을 수도, 반 고흐가 착용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사용의 흔적이 역력한 것을 보면요. 또 언젠가 누군가 이〈구두〉를 신을 수 있겠지요. 이 신발을 필요로 하면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신발은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반 고흐의〈구두〉주인은 단정을 짓기 어려울 뿐더러 쟁쟁한 철학자들이 벌인 신발 주인 찾기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동일한 신발에 대한 논란은 캔버스를 넘어 우리 현실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 당일 국내 언론을 통해 논란이 된 것은 한국 영화사에 기념할 만한 순간을 만든 그의 영화 세계가 아니라 낡은 신발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출연한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통해 이미 친숙해진 굳은 살 박힌 발뒤꿈치가 드러난 신발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너무 낡아 구겨진 가죽 신발이 그의 영화가 딛고 있는 독특한 세계와 그의 삶이 경유해 온 남달랐던 삶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 저처럼 맨 발로 구겨 신은 김기덕 감독의 낡은 신발이 반가웠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일부에서는 32만 원짜리 스페인산 브랜드 캠퍼로 밝혀진 김기덕 감독의 신발을 '허세'와 '실망'으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반 고흐의〈구두〉처럼 낡은 상태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결코 허름한 신발에 반 고흐가 담고자 한 '변변하지 못한 삶에 대한 경건함'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술 세계에 속한 한 점의 그림이든, 현실 세계 내의 한 개의 사건이든 우리 시선이 오래 머물러야 할 것은 낱낱의 현상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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