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의 항해사, '황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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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의 항해사, '황해문화'
  • 이장열 기자
  • 승인 2012.10.07 2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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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대 사람들 톡톡인터뷰 6> '황해문화' 전성원 편집장

추석 연휴를 막 지난 10월 4일(목) 오전 10시 20분부터 새얼문화재단이 자리한 중구 신흥동 정석빌딩 8층 회의실에서 <황해문화> 전성원(42) 편집장을 만나 1시간 10분 가량 인터뷰했다.
 
회의실에는 신문과 잡지 등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제호들이 시간의 때를 묻은 채 책장 안에 놓여 있다. <사상계>(영인본)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전성원 편집장은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0년 산(産)이다. 곧장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안 형편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돈벌이가 필요했다. 1987년 고등학교 때 학교운동을 실천했다. 3년 동안 막노동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경북 칠곡까지 가서 일을 했다.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1994년 졸업과 동시에 광고회사에 들어갔다. 자신이 맡았던 한보철강이 문제를 일으키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광고회사를 그만둔다. 막막했지만 그 당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1996년 직장을 그만두고 3개월 정도 '백수생활'을 하던 중 당시 황해문화 편집장 장석남 시인이 같이 일을 하자고 손을 내밀어 인천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장석남 시인은 서울예전 선배다. 전성원 편집장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000년 같은 과 동기와 결혼해 인천에서 살았다. (현재는 육아를 위해 파주에 임시거주 중) 그는 이제 인천에 뼈를 묻을 태세다. 아이는 인천 사람으로 키울 것이다.
 
1960년대 <사상계> 전통을 잇는다

- 언제부터 <황해문화> 편집장을 맡았나?

<황해문화>는 1993년 겨울호로 창간호를 냈다. 1996년 처음 <황해문화> 편집부원으로 입사한 뒤 편집부 일을 맡아 오다가, 장석남 편집장이 그만두면서 자연스럽게 편집장 역할을 맡았다. <황해문화> 13호부터 직접 편집장 일을 했고, 공식적으로 '전성원 편집장' 이름으로 낸 때는 1997 여름호(제15호)부터다.
 
- <황해문화>가 우리 잡지사에서 놓인 자리와 의미는?

<황해문화>는 우리 잡지사에서 1960년대 장준하 선생이 만든 <사상계> 맥을 잇는다고 판단한다. 1970년대 나온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은 모두 문예잡지였다. 현재까지 이 문예잡지들은 나오고 있다. <사상계>는 종합잡지로서 정치, 사회, 문화, 지역 등 다양한 지식 담론들을 생산하였고, 그것이 1960년대 우리 사회에 이바지하고 남긴 족적은 매우 크고 넓었다. 그런데 <사상계>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폐간된 이후 현재 <사상계>와 같이 지식담론을 생산하는 매체는 유일하게 <황해문화>만 있다는 점이 아쉬움이자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황해문화>는 인천이라는 지역과 함께 하지만, 전국적 차원의 지식 담론을 다루는 매체로서 그 역할을 당당하게 묵묵히 해나간다고 볼 수 있다.
 
인천은 대한민국의 축소판, 그래서 <황해문화>존재한다

- <황해문화> 존재감은 인천지역을 뛰어 넘는다고 보는데?

<황해문화>는 시민공익재단인 새얼문화재단에서 만든다. 출판사가 잡지를 만드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앞서 <사상계>와 유사한 형태다. 출판사가 잡지를 만들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문화권력이 형성되고, 그곳으로 고개를 내밀 수 밖에 없다. <황해문화>는 말 그대로 이른바 출판과 문화권력을 형성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 <황해문화>에 집중해서 느리지만 지금까지 걸어오고 있다. 다른 부수적인 출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황해문화> 꾸준함의 원천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부한 자부심이다. <황해문화>는 인천지역만을 다루지 않는다. 인천지역 문제가 곧 한국 문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선후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천은 대한민국 문제를 집약한 도시라고 생각한다. 인천 문제가 우리나라 문제와 곧장 연결되는 구조를 지닌다. 이런 특이성으로 인천에서 발행하는 <황해문화>가 전국적 전파력을 갖는다.
 
- <황해문화> 발간 이유와 앞으로 지향점은?

<황해문화>는 처음과 끝이 흔들림 없이 같다. 처음 계간지 발간은 인천 지역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 목표를 두었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황을 전방위적 시선으로 파악해 일반 독자들에게 알려내는 중간매개자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데 있었다. <황해문화> 출발점이자 끝 지점이다.< 황해문화> 힘이 이것이다. 이 원칙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의 문제에 돌린 적이 없다.

- <황해문화> 2012 겨울호는 어떤 기획특집인가?

11월 중에 나온다. 이번 겨울(77호) 특집은 가을호(제76호)에서 다룬 '경제민주화에 대한 성찰' 연장선상에서 구체적으로 '노동'에 천착한다. 문제 인식은 왜 노동은, 아니 노동자는 낮은 대접을 여전히 받고 있는가에 대한 제기로부터 나왔다. 노동은 왜 낮은 위치에 놓여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1997년 IMF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한국사회가 경제담론에 매달려 15년을 흘러 왔다. 노동 가치와 노동자 위치는 낮은 대접과 낮은 위치에 머물러 있는 이유에 대해 문제를 직접 제기하고자 한다. 이른바 노동대중이 가져야 할 권리가 훼손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들이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사태로 나타났다.
 
- <황해문화> 범주는 무엇인가?

황해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따온 명칭이 아니다. 단순히 서쪽에 있는 바다가 아니다. 황해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오랜 세월 들고나간 소통의 장이라는 점에 방점을 두고 있다. 서로 연결된 상황, 들고 나가고 나가고 드는 순환이 숱하게 황해를 매개로 이뤄졌다. 더 나아가 이데아적 세계로서 황해도 자리잡고 있다.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지만, 인류가 늘 지향하는 목표로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황해는 이데아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이데아로 나아가는 항해자로서 <황해문화>는 놓인다. 
 
'편집권 독립'처음부터 구축된 원칙

- <황해문화> 편집권은 독립되어 있는가?

편집권 독립은 <황해문화> 발간 때부터 유지되어 온 원칙이다. 이것이 <황해문화>가 발간된 이후 76호까지 나오게 된 두 번째 가장 큰 동력이다. 편집회의 때에는 편집위원들만 참석한다. 재단 관계자들은 어떤 사람도 참석하지 않는다. 특히 재단 지용택 이사장께서 편집권 독립은 매우 중요한 장치이자 가치임을 잘 알고 계신다. 편집위원들과 주간, 편집자문위원 들이 상호 토론과 논쟁을 통해 기획과 필진들을 선택해 왔다.
 
- 지역에서 나오는 종합 잡지는 어떠해야 하나?

지역에 너무 매몰되는 순간 잡지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따라서 <황해문화>도 이 점을 늘 경계한다. 지역중심에 두되, 전국적 시선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적 시각, 세계사적 시각을 동시에 갖는 시력을 가져야 한다.  또한 지역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종합잡지는 달라야 한다. 짧은 시간에 관심을 두는 편집 방식도 오래 가지 못한다. 독자들이 외면한다. 깊이 있게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 예를 들어 골프장 문제가 나올 때,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접근해서 그 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일 때, 독자들은 잡지를 꺼내 보게 되고 문제의식을 갖는다.  결국 지식 담론지로서 <황해문화>는 SNS시대와 정반대 속도이어야 한다. 느리게 천천히 문제에 천착하는 자세다. 우리가 점점 이런 느리게 보는 방식을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다. <황해문화>는 느리게 느리게 항해를 해나갈 것이다. 느리게 느리게 가는 것은 구조적 얽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직도 유효한 방식이자 인류가 만든 역사의식이기 때문이다.
 
- <황해문화>가 지나온 길은 늘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황해문화> 편집방향과 내용은 이미 처음 발간될 때부터 마련되어 있다. 그것은 현장과 현실을 중시하는 자세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자세로 세상과 마주해 온 것이다. 늘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다른 말이다. 현실은 늘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황해문화>가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 늘 흔들리는 나침반처럼 함께 움직여 주었기에 이런 평가를 받는다. <황해문화>가 늘 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늙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이런 노력으로 유가지로 계간 <황해문화>가 4,500부씩 전국 서점을 통해 판매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2013년은 황해문화 발간 20주년,  6뒤면 발간 100

- 바람과 고민이 있다면?

2013년 겨울호가 나오면 황해문화 발간 20주년이다. 내년이다. 늘 그렇지만 20주년은 저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제가 황해문화에 입사한 지 16년째이다. 저와 <황해문화>가 나란히 놓이는 느낌이라서 더욱 그렇다. 제대로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황해문화> 100호가 발행되는 시기는 현재까지 76호가 나온 것을 계산하면 불과 6년 뒤다. 사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그래서 고민이고 긴장된다. 처음 편집장을 맡았을 때,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아니 처음 장석남 시인이 불러 인천에 왔을 때도 너무 삭막한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인천사람도 아닌데 , <황해문화> 편집장. 너무 어깨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제가 인천에 와서 인천을 알고자 일부러 걸어서 인천의 골목길과 장소들을 만나러 다녔다. 괭이부리 마을을 비롯해 계양구, 부평구, 남동구, 서구 등 인천 동네들을 몇 년 동안 구석구석 걸어서 다녔다. 어느새 사람도 만나게 되고, 시간이 지나니 인천에 정이 들기 시작하고, 인천에서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인천이 편안한 곳으로 되었다. 인천에 뼈를 묻을 생각이다. 제 딸 아이는 인천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전성원 편집장은 전문대 출신이 잡지 편집장 노릇 하는 데가 <황해문화>가 유일하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권력과 권력구조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다. <황해문화> 항해에는 이른바 숱한 물길이 있을 뿐, 여기에는 길이라고 표시된 데가 없다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다. <황해문화>에는 정해진 항로가 없다. 정해진 줄이 없다는 뜻이다. 황해의 항해 길은 누구나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임을 <황해문화>는 그대로 보여준 셈이다. <황해문화>를 만들어 내는 인천의 숱한 저력이 전성원 편집장의 육중한 몸짓과 말씨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인천 덕적도 출신 시인 장석남 전 편집장이 전성원 편집장에게 귀엣말로 이렇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황해문화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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