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로서의 '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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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로서의 '아랑'
  • 장재연
  • 승인 2012.10.1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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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장재연 / 소설가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이름 하여 <아랑 사또전>이다. 이 극의 장르에 대해서 누군가는 아랑 설화를 근간으로 판타지와 미스터리, 로맨스와 활극이라는 복합적인 장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한국형 판타지 사극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아직 장르를 규정하기에는 이르다고도 한다. 어쨌든 부인할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밀양 지방의 아랑 전설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텍스트라고 한다면 작품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데 창작을 함에 있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생각은 ‘상호 텍스트성’으로 이어진다. 상호 텍스트성은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여러 텍스트들과 맺고 있는 상호 연관성을 중시한다. 패러디는 이런 부분에서 발생한다.
 
김영하의 장편소설 [아랑은 왜] 역시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아랑각 전설’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의 서술방식은 전형적인 메타픽션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이채롭다.
 
메타픽션은 하나의 픽션을 창작함과 동시에 그 픽션의 창작과정에 대한 진술을 한다. 요컨대 구성을 이뤄 나가는 자신들의 방법을 비판하면서, 서사소설의 근본적인 구조들을 검토할 뿐만 아니라 허구적인 문학텍스트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의 있을 수 있는 허구성을 검토함으로써 소설의 세계와 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1)
 
이를 ‘소설가 소설’ 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형식에는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가 있다. 1930년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1970년대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로 패러디 되고, 또 1990년대에는 주인석의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로 패러디 되고 있다. 그러니까 메타픽션의 형식과 함께 모티프가 패러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랑은 왜] 역시 그 메타픽션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스스로의 소설 쓰기를 검토하고 반성하기 위해 서사의 근본적인 구조를 심문하며 패러디하는 것이다. 이때 패러디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원 텍스트와의 차이에서 작가의 패러디 의도를 드러내는 모방적 패러디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원전의 근거는 인정하지만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여 이데올로기 속에 숨은 진실을 꺼내는 것이다.
 
작가는 서두에 벌써 이 작품이 패러디 작품임을 선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함께 메타픽션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아랑은 나비가 되었다고 한다. ......................................중략,
 
아랑은 큰줄흰나비였을 가능성이 크다2).
 
그냥 나비가 아니라 큰줄흰나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작가가 ‘진실’의 허구성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소설의 재현능력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는 전초전인 셈이다. 그러면서 소설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종래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스스로가 하나의 허구적 구축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독자에게 내보이는 것이다.
 
이어서 작가는 아랑전설의 여러 가지 상이점들을 제시한다. 우선은 ‘나비’가 등장하지 않는 텍스트가 있으며, 아랑의 살해자로는 ‘백가’라는 통인과 ‘주기’라는 통인, 그리고 또 관노의 신분으로 묘사되는 텍스트가 있고, 또 아랑의 신분이 군수의 딸이 아니라 군수의 첩 혹은 기생이라는 텍스트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점에서 작가는 아랑전설의 틈을 발견하고 이러한 틈을 활용하여 피살자의 사인을 밝혀내는 법의학자의 자세로 아랑 전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 할 것을 독자에게 천명한다. 그러면서 아랑의 이름이 ‘윤정옥’임을 빌미로 딱지본 ‘정옥낭자전’까지 허구로 만들어내어 그 내용을 그럴싸하게 독자에게 들려주는데 이것은 자신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작품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후로 작가는 자신이 이 소설을 씀에 있어 필요한 요소, 즉 인물, 배경, 시점 등을 어떻게 구상해가며 작업에 임하는가를 독자에게 보여주면서 또한 현대의 인물을 내세워서 아랑 전설 텍스트에 대한 패러디를 해나가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이 작품이 은폐되고 모순된 것, 혹은 이데올로기 속에 숨은 진실을 드러내어 원전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남성의 지배적 폭력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계급적 폭력보다 성폭력, 즉 ’강간 이미지‘에 대한 성찰은 굳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에서는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
 
진정한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문학이나 예술 작품은 모자이크와도 같아서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작품들을 다시 결합하고 배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거나 기존의 작품들을 재구성 또는 재해석하는 것으로 예술의 재미가 변모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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