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청춘을 착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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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청춘을 착취하는가
  • 김명남
  • 승인 2012.11.0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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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김명남 / 시인

 

 2012년 11월 4일, KBS 2TV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 3일』-「그래도 청춘이다 - 273번 버스의 3일」을 봤다. 273번 버스는 한국외국어대를 시작으로, 경희대와 고려대, 한성대와 이대, 홍익대 등 서울 시내 9개 대학을 거치는 까닭에 승객의 70~80%가 대학생이란다. 말 그대로 ‘청춘버스’이다. 언제나 싱그럽고 활기찬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버스에 현실이라는 돋보기를 들이대니 청춘들의 일상은 청춘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취업 걱정, 진로 고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우리 사회의 고착화와 아찔함이 드러났다.

 

청춘이라고 불리는 때, 힘겨움의 원인이 본인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아픔이라기보다 외부에서 달려든 아픔들이기에 텔레비전을 보는 내내 가슴이 미어졌다.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이 청춘을 빼앗긴 채 청춘이라고 믿고 있는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바짝바짝

 

실업이 길바닥에 즐비하고

등 떠밀려 막다른 골목까지 쫓겨들어와

어쩔 수 없이 털갈이까지 한

송곳 같은 아우성만 겨우 남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하는 너와 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리고

달랑 휴대전화 문자 한 통으로 언제 해고 통지를 받을지 모를

곤달걀 같은,

 

등록금 천만 원 시대

배부른 소리 같지만

모름지기 대학생이라면

인생이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또 사회구조가 어떻고

시대현실이 어떻고 하느라

꼴딱 뜬눈으로 넘긴 밤이 짧다고

앞대의 스밈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호기도 부리면서

따끔거리는 연애로 두근두근을 심장에 새기기도 하고

눈동자에 저벅저벅을 집어넣은 듯 바윗돌 앞으로 돌진해야 하거늘

 

거친 물살 가르는 깨끗하고 단단한 쇠라고 외쳐보기는커녕

학자금 빚만 두 손에 꼭 쥔 채

미처 바깥공기에 닿기도 전에 녹스는 일만 남은,

 

조마조마가

가슴에 막 솟기 시작한 앞날을 부러뜨리자

비척비척이 슬그머니 다가와 아슬아슬을 가슴에 꽂는다


위 시는 필자가 시전문 문예지 『시와시』여름호에 발표한 졸시이다. 워낙 사회가 각박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서 젊은이들은 문화를 향유할 수도 연애를 할 수도 없다. 게다가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감시와 비판 기능에까지 무감각해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까워 쓴 시이다. 그런데 왜 이 시가 갑자기 또다시 떠올려지는 것인지.

심지어 중고생 아이들의 꿈이 정규직이란다. 구체적인 직업 이름이나 종류를 대기보다는 그냥 정규직이란다. 꿈꾸기도 전에 아이들은 좌절과 포기를 먼저 배우면서 곪아가고 있다. 참 서글프고 비참한 일이다. 대통령이 꿈인 아이들이 교실에서 절반이나 되던 옛날이 행복한 세상이었지 싶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견강부회로 젊은이들의 감성을 흔들면서 더욱더 견고한 자신들만의 옹벽을 치기에 바쁘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젊은 청춘들 각자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우기면서 자신들이 만든 잘못된 법과 제도마저 은근슬쩍 덮으려든다. 젊음들에 대한 멘토를 자청하는 저명인사들의 언어나 저작물은 뜬구름이며 언구럭이며 헛소리이다. 기성세대가 저지른 오류와 잘못에 대한 책임회피용 논리일 뿐이다. 지금 청춘들에게 필요한 건 위로하는 척, 능력을 인정하는 척하는 패기, 열정, 봉사, 미래와 같은 헛소리로 포장된 멘토가 아니다. 기성사회가 할 일은 구역질나는 멘토 대신 젊음이 어깨 펴고, 환한 청춘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자리와 토대를 마련해주는 게 급선무이다. 청춘들의 삶과 미래가 죄 없는 아기를 쇳물에 집어넣은 에밀레종 설화 같아서야 되겠는가?

이미 얻을 대로 얻고 가질 대로 가진 사람들이 자본주의 생리에 맞게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만든 법률이나 제도로써 청춘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인 1990년대 초만 해도 시골에서 키우던 소 팔고 품 팔아 어떻게든 대학공부를 시켜놓으면 그 다음은 자식들이 알아서 그런대로 미래를 색칠할 수 있는 사회구조였다. 지금은 부모가 취직자리도 알아봐줘야 되고, 자식들의 스펙을 다지기 위해 부모들의 삶까지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 하는, 분칠된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건 개개인이 무능하거나 못나서가 아니다.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하게끔 만든 어른들의 책임이다. 매순간 눈부시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청춘들이 왜 3포 세대라는 서글픈 이름을 얻어야만 하는가! 왜 젊은이들을 구석으로 내모는가!

아주 오래 전 어느 소설에서 읽은 문구가 떠오른다. 방황은 청춘의 특권이 아니라 형벌이다, 라는. 그때는 그게 위안이었고 진리처럼 들렸다. 그래 내 방황이 젊기에 당연히 맞닥뜨리는 통과의례라고 여기면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흔이 넘은 지금 생각하니 그건 완전 사기다. 청춘이 축복으로 가슴에 남아야지 어찌 불안과 형벌로 남아서야 되겠는가? 아무 잘못 없는 우리의 청춘들을 언제까지 프레카리아트로 남겨두어야 하는가! 과연 그래도 청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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