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상태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 양진채
  • 승인 2012.11.11 1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칼럼] 양진채 / 소설가



내 친구는 요즘 예뻐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농담 처럼 사랑에 빠진 거 아냐? 했더니 뜻밖에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도 이런 감정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내 친구가 사랑하는 이는 현실적으로 맺어질 수 없는 관계다.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도 못한다. 다 안다.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 가슴 뛰는 자신을 보는 일이 행복할 뿐이다. 아직 뛰는 가슴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하다. 나는 내 단편소설 <봄날의 테이블보>를 떠올렸다.

 

당신이 떠오를 때면 제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번집니다. 일부러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제 무의식 속에서 당신이 떠오릅니다. 뜬금없이. 그럴 때면 저는 양파를 다듬다 말고, 빨래를 널다 말고, 음악을 듣다 말고,가 됩니다. 바로 이전의 행위는 멈춰버리고 얼마간 당신의 부드러운 미소를 따라해 봅니다. 당신의 환한 얼굴에 파인 보조개를 떠올리는 일처럼 따뜻한 일이 있을까요. 햇살이 고일 것 같은 보조개입니다. 모든 사물들을 등 토닥여 깨우는 봄 햇살처럼 당신은 나를 깨웁니다. 그러면 나는 괜히 신이 나서 몸에 막 힘이 들어갑니다. 양파를 다지는 칼날은 경쾌해지고, 빨래는 한 번 더 팽팽하게 당겨지고, 음악의 볼륨은 올라갑니다. 간지럽지만, 당신은 내게 힘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구효서 소설가의 『내 목련 한 그루』에 나오는 한 구절도 떠올랐다.

 

사랑은 아무에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 찾아왔다가 몸속에 아무런 항체도 남기지 않은 채 불쑥 떠나버리는 감기 바이러스와도 같은 게 아닐까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힘이 된다. 감출 수 없을 만큼 좋아 얼굴에 드러난다. 얼굴이 환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서로에게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 자존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세월이 갈수록 흰 머리카락은 늘고, 가슴이 처지고 주름이 늘고, 거동이 불편해지고 우리는 점점 쇠락해간다. 결 고운 섬세한 마음도 어느새 뻣뻣해진 피부만큼이나 각질이 쌓인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도 자신도 모르게 그 각질 쌓인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감정이 요동친다. 그 감정은 플라토닉이니, 에로스니 하는 감정 이전의 마음이다. 특히나 나이 들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못 성스러운 것이다. 삶을 충실이 살았으며 자신의 감정을 녹슬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내가 연애하고 싶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 처럼 온다. 이 바이러스를 잘 다스렸으면 좋겠다. 살아가면서 문득 그 때 그 좋았던 감정을 떠올릴 때, 삶이 고독하지만은 안았구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을이 깊어가니 마음이 ‘마지막 잎새’가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