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땅에 산 지 18년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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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땅에 산 지 18년 됐어요."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01.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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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이네' 주인장 함민복 시인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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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초지대교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초지인삼센터가 나온다. 그 인삼센터에 들어가면 ‘길상이네’ 가게가 있다. 삼과 홍삼 원액, 사자발쑥 엑기스를 비롯한 물건을 팔고 있는 곳, 그곳에서 함민복 시인을 만났다. ‘길상이네’ 가게 이름은 집에서 키우는 믹스 진돗개 이름을 따서 지었다. 시인은 ‘길상면’이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개가 ‘잘생겼다’며 웃었다.
 
너무 일찍 나오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에 함 시인은 따끈한 생강차를 손수 타서 내놓았다. “요샌 잘 안 나오다가 아는 사람이 오면 나온다. 한겨울이라 가게에 사람이 많지 않다”며 “글은 주로 집에서 쓴다. 곧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가제)> 시가 나올 예정이다”고 말했다. <눈물은 왜 짠가>라는 잘 알려진 시와도 일맥상통하는 제목이었다. 다음달께 새로 나올 시집의 내용은 “뜨겁고 단호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딴전 피우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 그런 점들에 대한 반성을 담은 시집이다”고 말했다.
 
그물은 다음 사리에 매기로 하고/그물 말뚝 붙잡아 맬/써개말뚝 박고 오는데/벌써 경진 엄마 머리에서/숭어가 하얗게 뛴다//그물 매는 것 배우러 나갔던/나도 신이 나서//경진 아빠 배 좀 신나게 몰아보지/먼지도 안 나는 길인데 뭐!('승리호의 봄' , <말랑말랑한 힘>시집에서)
 
함 시인의 집은 큰길에서 10분 거리 떨어진 곳인데 조용한 편이라고 했다. 그 자리는 감목관이라고, 조선 세종 때 길상농장 관리인이 기거하던 곳이다. 다시 말해 목초관리사가 있던 곳이다. 제주도 말을 강화로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날이 추워 죽을 확률이 많아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약 1500마리 정도 관말이 있었다고 한다. 길상면의 ‘길상’은 황토로 토질이 무척 좋아 말이 살기 좋은 땅이었다.
시인이 강화에 산 지 벌써 18년이 되었다. “예전에 강화는 차량이 많지 않았다. 다리도 하나여서 드나드는 사람이 지금보다는 적었다. 하지만 다리가 하나 더 생기면서 하나로 들어오고 하나로 나가면서 많이 바뀌었다. 엄청 바뀌기는 했지만 강화를 제대로 알리는 게 좋다고 본다. 민속촌처럼 묶이는 것은 잘못이다. 강화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강화 곳곳에 담긴 정신을 살리면서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북한과 관계가 좋아진다면, 사실 묶인 곳도 저절로 풀릴 것이다. 뭐든지 효과적으로 풀어가면 좋을 것이다”며 시인은 세월의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또 “올해 두루미가 강화에 왔다고 사진작가가 일러주었다. 두루미는 생각보다 울음소리가 워낙 커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쿠르르르 쿠르르르… 지난해에는 열여섯 마리 정도 왔다는데 올해는 네 마리 정도 왔다더라”며 두루미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아마도 시인은 강화에 사는 온갖 새들과 친하게 지낼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인은, 바닷가는 ‘보러’만 다닌다. 오랫동안 살던 동막해변을 낀 마을은 바람 쏘이러 가끔 간다. 직접 바다에 들어갈 일은 없고, 다들 뭐를 잡나 뭐가 잡히나 궁금할 때 예전에 살던 곳을 들르고 마니산을 오른다.
강화도에는 외지 사람이 터를 일구고 많이 산다. 시인 말로는, 강화도에는 외지인이 1만8천명이 있다. 화가가 300명, 정년퇴직한 교수가 300명이나 되는데, 교수 제자들까지 생각하면 강화에는 외지인이 엄청나게 많이 와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함 시인은 고향 충북 충주에는 명절에만 가게 된다고 한다. 충주와 강화의 공통점이 있다고 전했다. 3대 대사 가운데 한 사람인 함허대사가 충북 중원 사람인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정수사 옆 함허동천을 비롯해 정수사에는 함허대사 부도비가 있다. 시인은 18년째 강화에 살면서 이제 강화가 고향 충주처럼 아늑하고 푸근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시인은 결혼한 지 세 해째가 된다. 결혼해서 시가 얼마나 달라졌나 물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좋은 제도니까 여태껏 살아남았을 것이다. 결혼하고 시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한참 걸리는 편이다. 결혼한 지 햇수로 3년째인데 시는 더 익숙해지면 나올 것 같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결혼은 수평적 사고, 그러니까 결혼 전에는 스스로 용납하면 혼자 결정했는데, 결혼하고서는 그렇지 않다. 수평적 사고와 개념에 변화가 생겼다. 가게 일도 마찬가지다. 삼이나 가게 일에 대해서도 더 익숙해야 시가 나올 것이다. 좀더 숙고해서 쓸 일이다”고 말했다.
 
긴 상이 있다/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좁은 문이 나타나면/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걸음을 옮겨야 한다/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다 온 것 같다고/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한 발/또 한 발('부부', <말랑말랑한 힘> 시집에서)

시 쓰려는 사람이 남녀노소 무척 많은데, 시는 어떻게 써야 하나 물었다. 시인은 “너무 시답게 쓰려면 안 써진다. 시답게 쓰는 표현을 쓰려면 전달하려는 데 실패한다. 그 과정에서 사라진다. 시를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 이전의 느낌을 살려야 한다”며 “젊은 사람들이 동인 활동하는 것은 긍정적인 점이 많다. 하지만 동인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세계를 나름 견고히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동인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시를 쓰는 데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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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땅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냐고 물었더니 시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전에는 진보주의자들이 많았던 땅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상처를 많이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강화는 어떤 식으로든 변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마음경제를 다독여 살기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서로 생각하면 부딪침은 있겠지만 확실히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소통을 찾아내야 한다.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모두가 잘 살 수 있을 것이다”고 시인은 말했다. 또 “21세기는 정신적인 문제를 많이 해결해야 한다. 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생기는데, 그걸 해결하려고 실천하는 분들이 강화에는 많다. 또 협동조합 등 좋은 데로 이끌어보자는 움직임이 많아 긍정적이다. 힘든 상황이라고 피하기만 하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극복해야 한다.”

강화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18년이 된다는 함민복 시인. 언제나 따뜻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강화에 살고 있다. 그가 인천에 살고 있다는 것이 참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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