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목동(栗木洞) - 싸리재 밖 밤나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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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목동(栗木洞) - 싸리재 밖 밤나무골
  • 배성수
  • 승인 2013.02.22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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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배성수 /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05. 율목도서관.JPG
율목도서관
 
[인천공간탐사] 개항장 언저리 4
 
어린시절 도서관은 마음껏 책을 보았다거나, 열심히 공부했던 곳이라기보다는 시험공부를 빙자해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일종의 놀이터였다. 도서관 주변은 언제나 또래들로 가득했고, 놀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했기에 시험 때임에도 정작 열람실에서 머무는 시간보다 거리를 쏘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게다가 꽃피는 5월의 도서관은 어찌 그리 예쁘던지...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정원의 꽃한송이마저도 유혹거리였다. 그런 탓에 나에게 있어 도서관은 치열했던 학창시절의 학습공간이라기 보다는 낭만의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립도서관(지금의 율목도서관)이 있기에 율목동은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특별히 정겹게 기억되는 곳이다. 무거운 가방에 가뿐 숨을 내쉬며 언덕길을 올라서면 탁트인 전망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반갑게 맞아주는 그 곳. 도서관이 있는 밤나무골 율목동이다.
외동에서 율목동으로
개항장에서 서울로 향하던 길목인 싸리재의 바깥은 별다른 지명없이 축현외동(杻峴外洞), 또는 외동(外洞)이라 불리고 있었다. 개항기 외동은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는데 대개 싸리재 고갯길의 아랫쪽, 지금의 용동일대와 배다리 철로변 구릉에 조선인 가옥들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싸리재 위쪽은 그저 수풀이 우거진 동산이었을 뿐으로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이었던 이하영(李夏榮)의 소유지였다. 1905년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이곳은 유정(柳町)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율목리(栗木里)가 되었다. 비로소 ‘율목’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그 이전의 문헌기록에서 ‘율목’이라는 지명을 찾아볼 수는 없다. 언제부터 이곳을 밤나무골이라 불렀는지, 또 어떤 이유에서 이곳에 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민가가 몇 채 없는 숲이었다면, 아마도 밤나무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추해볼 뿐이다.
밤나무 숲에 들어선 신공동묘지
신생동과 답동일대에 조성된 일본인 공동묘지 인근으로 학교와 사찰이 들어서고 주거지가 형성되자 일본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공동묘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1902년 일본거류민회는 답동 성당 북쪽의 부지 364평을 싸리재 위쪽 이하영 소유의 언덕 3,577평과 교환하였고, 이곳에 새로운 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1903년부터 구 공동묘지의 분묘들을 이곳으로 옯기기 시작했는데 우선 전체면적 중 900평을 할당하여 신생동의 해군묘지와 답동의 육군묘지를 이장하였다. 그리고 공동묘지가 들어선 언덕 아래쪽으로 화장장을 두었다. 화장장 역시 원래는 공동묘지의 동쪽 끝에 있던 것을 공동묘지와 함께 옮긴 것으로 1922년 도원동으로 다시 이전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던 율목동 언덕은 해방 이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가 1970년대 풀장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공원이 되어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01. 1908년 인천항평면도에 보이는 일본묘지.jpg
중국인 우리탕과 일본인 리키다케의 별장
율목동 일본인 공동묘지 너머 남쪽 구릉 일대는 중국인 우리탕[吳禮堂] 소유의 땅이었다.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인천항의 전망은 자유공원이나 월미도의 그것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우리탕은 전망 좋은 이곳에 별장을 짓고 정원에 중국의 꽃과 화초를 가꾸었는데 특히 포도, 배, 사과가 많이 열렸다고 한다. 1912년 우리탕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과 조카 사이에 재산권 다툼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그의 막대한 재산은 대부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율목동에 있던 그의 별장은 일본인 상공업자 리키다케 헤이하치[力武平八]의 소유가 되었는데 당시의 일본식 정원석과 석등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별장을 가꾸었던 그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이 별장의 주인이었던 리키다케는 일본 사가현 출신으로 1884년 인천에 들어와 각국거류지에 역무상점(力武商店)을 개업하고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1896년 부산으로 잠시 사업무대를 옮겼다가 인천으로 다시 돌아와 1904년에 역무정미소(力武精米所)롤 개업하였다. 그는 정미업 외에도 광산업 등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하는데 역무정미소는 1910년대 인천에서 가장 규모가 컸으며, 그즈음 우리탕의 별장을 인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그의 사업을 이어받은 아들 리키다케 카지로[力武嘉次郞]는 회사의 이름을 역무물산으로 바꾸고 정미소 외에 신흥동에 연탄공장을 설립하여 사업을 확장해갔다. 리키다케 집안은 개항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대를 이어 인천의 대표적인 부호로 자리매김하였다. 율목동 리키다케 집안의 별장은 1940년대 들어 인천부의 소유가 되는데 리키다케가 이 별장을 인천부에 매각한 것인지 기부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04._리키다케_별장의_정원석.JPG
리키다케 별장의 정원석
이방인의 별장에서 도서관으로
항구를 조망하는 빼어난 전망으로 이방인들의 별장지였던 율목동 남쪽 구릉은 소유권이 인천부로 넘어오게 되면서 공공용지로 전환되었다. 1941년 인천부는 이곳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자유공원에 있던 인천부립도서관을 이전하였다. 인천부립도서관은 1921년 11월 개항기 독일계 무역회사였던 세창양행 사택에서 개관한 도서관으로 지금은 이름도 장소도 바뀌었지만, 공립도서관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부립도서관은 응봉산 마루턱에 위치하여 이용객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개관당시부터 이전논란이 있었던 차에 개관 20년만인 1941년 리키다케의 별장부지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이전하게 된 것이다. 해방이 되면서 인천부립도서관은 자연스레 인천시립도서관이 되었고, 그로부터 70년 가까이 시민들에게 율목동 시립도서관으로 기억되어 왔다. 시립도서관이 미추홀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이사를 갔어도, 지은 지 70년이 넘은 도서관 건물에 율목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었어도 인천사람들에게 이곳은 언제나 정겨운 ‘도서관’일 뿐이다.
개항장이 번성했던 시절 밤나무골 율목동은 인천에서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촌이었다. 개항장 언저리에 있었지만, 서울 가는 길목 싸리재와 닿아있고 역전 상권에서 가까웠던 탓에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어깨를 맞대고 호기를 부리고 있었다 한다. 개항장이 퇴색하면서 이곳 율목동의 기와집 자리에도 다세대주택들이 들어서게 되고, 개항장 언저리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서민 동네가 되고 말았다. 이곳이 부자 동네이던 시절도, 서민동네가 되어버린 지금도 ‘율목동’은 탁트인 전망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맞아주던 ‘도서관’이 있어 특별한 곳이다. 그리고 도서관 뜨락에서 바라보이는 인천항의 풍경은 여전히 수험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03. 율목공원.JPG
율목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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