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나를 드러내는 작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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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나를 드러내는 작업이 아니다
  • 이장열 기자
  • 승인 2013.02.25 19:5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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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대 사람들 톡톡인터뷰 ⑪ 작가(作家) 민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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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은 빤해서 식상할텐테'
 
인천에서 '민운기'는 뭔가 빤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비판적 시선이 가로놓여 있는 듯 했다. '외골수', '강직' 따위의 표현은 좌우 문맥 없이 씌여지는 순간, 큰 장애물이 되고 벽으로 남는다. 곧장 그런 프레임에 자신이 갖히는 순간 당사자에게는 마음에 생채기가 생긴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골이 패이게 된다.
 
이제 '민운기'는 인천 사람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먼저 인천으로 돈 벌려 나가 있던 누이를 따라 강원도 영월에서 인천으로 온 것이다. 인천에 온 것은 단순했다. 그 시대는 그랬다. 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서는 강원 열월 깡촌보다는 서울 가까이에 위치한 인천이 눈에 들어 온 것일 뿐이다. 딱히 다른 그 당시 인천에 오게 된 이유를 달리 찾을 길이 없다는, 그것이 진실이었다. 
    
빤한 것은 뭔가 생각했다. 빤한 생각은 달리 말하면 상식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속에는 촌스러운 마음씨가 강원도 감자씨처럼 놓여져, 사람들과 사람들을 고정된 시선과 고정된 맛과 고정된 소리로서 만나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작가 민운기는 인천에 흩뿌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 민운기는 그 씨앗이 싹을 틔우지 않았도 별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다가오는 미래의 모습이 중요하지 않고, 현재 지금 이 시간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 미래의 모습은 변하고 또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작가가 민운기다. 인천에서 살면서도 인천사람들을 그를 인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 그의 힘이자 에너지다.
 
작가 민운기는 1965년산이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서, 중3 때 인천으로 와, 송도고등학교 서울대를 거처 이때까지 인천에서 살아가고 있다. 남동구 구월동에서 동구 배다리로 옮겨 온  '스페이스빔'에서 그는 인천사람들과 만남을 그림 그리기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요즘 그림은 그리시냐"는 질문에 작가 민운기는 '저는 사람들을 만나서 일을 만들고 뭔가를 고민하는 활동이 미술 활동이라고 생각하기에 늘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한다"는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민운기는 '화가라는 닉네임보다는 작가가 저에게 맞다'며 예술이 범위를 한정하고 플레임을 만들어 내는 것에 쉼없이 저항하면서 중구 배다리를 거늘고 있는 작가가 민운기다.
 
작가 민운기와의 만남은 지난 19일 화요일 오전 11시 중구 배다리 '스페이스 빔'에서 이뤄졌다. 인터뷰는 2시간 동안 이어졌고, 인터뷰 간간이 스페이스 빔에서 함께 이번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는 고양이들이 오가며 문맥을 끊어줬다. 그래서 리듬감 있게 진행됐다.

작가 민운기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1978년 강원 영월에서 인천으로 와
 
- 언제 인천에 오셨나요
저는 1978년도 인천남중학교에 배정 받아 인천과는 인연을 처음 맺었습니다. 앞서 누나들이 고향 강원도 영월에서 나와 인천에서 미리 살고 있었습니다. 강원도 영월이 여전히 깡촌인지라, 부모들 마음이 한결같아서 서울 근처에 가야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부모님들의 마음에 따라서, 인천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당시 누나 두 분이 인천에서 인천 중구 사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어서, 저는 누나 자취방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뒤에 인천 송도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명암법' 처음 접하고 신기했다.
 
- 원래 그림 그리기에 관심은 언제부터
제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따라 그리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강원도 산골에서 그림 그리기는 당시 국민학교 수업시간이 이외에는 접할 수 없었던 시절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4학년때 당시 미술 선생님에게 다른 애들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셨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명암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 저는 평면적인 것만 그렸고, 봐 왔는데, 명암법이라는 기법을 이용해서 그린 그림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줘서 당시로서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니다. 교내에서 하는 제 그림들은 늘교실 뒷편 알림판에 게시되는 영광을 맛보면서 그림과 인연이 이어져 갔습니다.
 
부모님, 토탈 아트였다.
- 그림 그리기는 집안 분위기가 있었나?
시골에서 그림을 그리기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모님들에게 그림 그리기 재능을 물러 받은 것 아닌가 싶다. 농촌에서 부모님들은 자족적으로 생활을 영위했다. 그래서 농기구, 생활 용품들도 웬만하게 집에서 모두 만어서 사용한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러 모로 손 재주가 뛰어나셨던 것 같다. 그런 것이 제에게도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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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려도 생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본격 시작
- 화가로 나서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저는 중학교 때까지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영월에서 부모님들이 농사를 지어서 뒷바라자지 하는 처지라서 화가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천송도고등학교 입학하고, 미술시간에 유화로 그린 그림을 보신 미술 선생님이 미술반에 들어 올 생각이 없냐며 저를 미술반으로 데리고 갔는데, 미술반 선반 위에 있는 석고뎃셍 그림을 보고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잘 그렸다는 생각이 대번에 들었고, 제가 저렇게 까지 그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한번 이런 그림을 나도 한번 그려보고 싶은 생각에 미술반을 1학년 2학기에 들어가면서 화가라는 용어가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1학년 겨울방학을 맞이하는 무렵, 그림 그리기가 생활에도 보탬이 되긴 되는 것인가 걱정이 스물스물 일어나고, 겨울방학 동안 강원도 영월 부모님집으로 돌아와서는 더욱 암담한 생각에 빠져 들었습니다. 뭐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컸습니다. 어느날 집에 있던 <진학>잡지에 앞으로 유망학과로 '디자인과'가 소개된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림 그리기도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생활에도 보탬이 되는 것이 디자인과로 소개되어 있어서 마음을 다잡은 것입니다.
 
다시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복귀한 제가 다시 미술반에 들어가 열심히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습니다. 당시 송도고등학교 미술반에는 단원들이 1-3학년 통틀어 4명-5명 정도밖에는 없었습니다.

- 디자인 전공이 아닌 회화쪽으로 간 까닭은
제가 <진학>지에 실린 디자인과가 유망하다는 생각으로 디자인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입학 실습 시험에 보는 구상를 배웠습니다. 건데 이게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구상을 연습한 작품들이 영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 3학 겨울에 입시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재수 때 정말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숭의운동장 근처 상가에 있던 '백지화실'에서 무료로 그림 그리기 준비를 했습니다. 미술반 선배님이 인천에서 차린 화실이라서 제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인천에는 이런저런 화실이 많았습니다. 낮에는 율목도서관에서 입시 관련 준비도 하고 그렇게 해서 서울대학교 서양미술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입니다.

대학시절, 엉거주춤했다.
- 대학 생활은 어떠했나
저는 당시 85년도에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 정문은 늘 최루탄과 화염병이 뒤섞인 상태였고, 제 입학환영식 때에는 선배들이 와서 저희들에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넣으려는 모습을 보고는 조금 힘들었다고 하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여러가지 모순점이 넘쳐나 시절이었기에 누구나 힘든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 3학년대 과대표로 나간 이른바 운동권 후보를 1표 차로 이기고 과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했습니다. 제가 나가게 된 동기는 미술대학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선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고, 거부감을 일었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생활은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뭔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두려움과 분노, 저항감이 혼재되어 나타난 시기였습니다. 군대 갔다가 91년도 복학해보니, 교내 작업실에서 대중가요가 흘려 나와서 놀라웠습니다. 군대 가지 전까지 어림도 없는 분위기였는데, 시대가 훅 지나간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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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가 아니라, 작가다
- 미술의 성향은 어떠한가
대학 때 고민이 대학원 진학으로 제가 나아갈 작품 세계에 대해서 고민을 심도있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 진학까지는 뭔가 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집중헸고, 이것이 화가들의 일반적인 관습적인 생각입니다. 저도 매 한가지로 제 고민을 작품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작품이 매우 추상적인 형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제도화된 미술계의 좋지 못한 관습들도 보게 되고, 그곳에 빌붙지 않으면 낙오한다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면서 여러날 갈피를 찾지 못하며 더욱 추상화된 그림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런 고민으로부터 돌파구를 찾는 것이 제 어머니이었습니다. 제 어머니를 대상으로 삼아, 노동의 삶을 작품 속에 들여다 놓은 방식으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예술, 나 아닌 타인에게 다가서야
 
- '어머니'를 불러낸 이유는
제가 '한 여인의 삶, 그리고 노동'이라는 주제로 초대전을 1994년에 열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추상적인 형상에 내포되어 있는 관습과 권력, 애매모호성 등으로 탈피가 제 어머니의 노동을 매개로 일궈낸 것입니다. 이 작업은 저에게 일종의 살풀이와 같은 전개였습니다. 이 지점부터 사람을 제대로 그릴 수 있었습니다. 눈, 코, 귀도 사람 얼굴에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나아간 것이 '소래 마을'로 나아갔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로 나아간 것은 제가 대학원 시절을 마감하면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생각입니다. 그때 제가 예술은 나를 드러내는 작업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소통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입니다.
 
저에게 사람을 만나는 것도 미술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을 속으로 들어가 마을 사람들과 만나고 뭔가 만들고 고민하고 부대끼고 하는 것 모두가 창작 활도으로 일환인 셈이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천에 다시 1994년에 되돌아 와서 보니, 인천은 여전히 관습화된 제도에 얽매여 있었고, 소재, 기법도 옛날 방식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비판적인 시선에서도 '마을'쪽으로 작품 활동 방향을 잡은 것도 이런 인천의 미술활동의 풍토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일정정도 들어 있었습니다. 소재와 기법의 다양화한 자유로움의 추구가 우선되어야 사람 들 사이의 갈등과 불소통도 해소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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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공공성, 지역성, 자율성 확보부터
-'지역예술연구모임'은 무엇인가
제가 인천에 와서 작업실을 4분의 1일 쪼개서 만든 모임이 지역예술연구모임입니다. 인천의 미술활동에서 지역성과 공공성, 자율성을 확보가 필요하다는 미술인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이를 위한 사업도 함께 작지만 펼쳐나갔습니다. 95년도 모임이 결성되고, 97년도에는 <시각>도 발행하는 등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지역예술연구모임의 기억이 남는 활동은 '미술관 습격사건'인데, 참가자들이 까만 비닐봉지를 뒤집어 쓰고 미술관을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 공공성과 함께 지역성을 함께 확보하자는 의미로서 한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없이 임의적이고 즉흥적으로 한 행위도 나름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스페이스 빔이 2002년에도 만들어지면서, 이 모임은 2003년에 발전적으로 해체했습니다. 이 모임의 대부분의 회원분들의 스페이스빔의 운영위원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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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향과 목표는 그때그때 달라야 한다
- '스페이스 빔'의 방향
스페이스 빔에는 딱히 정한 방향이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화되는 것이기에 방향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방향을 정하는 순간, 우리는 정체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페이스 빔은 소통과 매개, 확장과 수축, 곧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살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이 기조를 지키고 사수하는 것이 제가 대표로서 맡아서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페이스 빔에서 빔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듯이, 스페이스 빔은 동네 사람들, 중구 사람들, 인천 사람들에 의해서 늘 색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공간으로 그리고 시간을 축적하는 시공간이 만나는 장소로서 스페이스 빔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굳이 이것을 '스페이스 빔' 방향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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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미 2013-02-26 13:10:29
중구 경동에 있는 쉼 갤러리 입니다.잘 지내시죠? 일전에 굴업도 사진전 일로 오셨었지요^^저도 영월 남면 북쌍리에 집이 있어 가끔 간답니다 ㅋㅋ 고향이 영월이시라니 더 친근감이 갑니다 ㅎㅎ 지나는 길이 있으시면 들르셔요 갓뽑은 커피 한 잔 대접할게요 올해도 화이팅 하시구요

양승은 2013-03-29 13:20:31
잘 읽었습니다. 스페이스 빔은 중구가 아니고 동구에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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