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 들고가다 빼앗기던 시절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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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들고가다 빼앗기던 시절 있었죠."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02.25 09: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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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여석 기타 오케스트라' 42년 동안 이끌어온 리여석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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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오케스트라 연주를 카페에서 한 달에 한 번은 연주할 수 있는데, 청중 입장에선 늘 보던 게 아니니까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또 일류 연주자를 부르면 출연료를 많이 줘야 하니까 재미가 없더군요. 처음에는 날마다 하려고 했는데, 싫어하는 손님도 있고 연주자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집중해주길 바라니까 잘 안 맞아요. 인천에서는 아직 라이브가 정착하기에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카페에서 격조 있는 음악을 들려주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서 1년에 두어 번 열어요. 지난 연말 송년회 연주할 때는 1백명이나 와서 애먹었어요. 50명 정도라야 편안히 보는데, 배나 오셨더라고요.”

중구 송학동 파랑돌 카페에서 리여석 기타 오케스트라 단장(73)을 만났다. 손님을 받지 않는 카페 1층은 커피 볶는 냄새로 구수했다. 리씨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게 손수 커피를 볶고 갈아 커피 한 잔을 내놓았다. 카페 1층은 왜 문을 닫았냐는 질문에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자유공원 아래 신포동 쪽으로 카페가 많이 생겼어요. 사람들이 힘들게 여기 자유공원 까지 올라오지 않죠. 그래도 나는 내 가게라 임대료 내는 부담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함께 살아야죠.”

“이 동네는 참 많이 바뀌었죠. 무엇보다 인천고, 인천여고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씁쓸해요. 오래된 일이지만, 인천고를 덥석 석바위 쪽으로 끌고갔잖아요. 인천여고는 오래된 건물이 참 멋있었죠. 연못에 라일락 목련꽃 피면 참 예뻤는데. 내가 인고 나오고, 우리 집사람이 인천여고 나왔어요. 예전에는 학교를 확장할 수 없어 갔는데, 좀더 견뎠으면 근처를 흡수해서 학교를 늘릴 수 있었을 겁니다. 제발 때려부수지만 말고 있는 거 잘 보존하면 얼마나 훌륭한 관광자원이 됐겠어요. 이미지를 살려야죠. 으레 신도시 쪽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모든 걸 경제성으로 따지면 안 되잖아요. 장기적인 안목으로 틀을 잡아 1백년 2백년을 내다봐야죠.”
 
카페 통창 밖으로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인천항이 보인다. “항구를 못 들어가게만 하지 말고 친수공간을 많이 만들어 바다를 가까이서 봐야 합니다. 인천이란 도시 구석구석에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것도 받아들여야 하는 역사죠. 인천은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 근대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중구는 관광자원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어요. 누가 과감하게 볼썽사납게 생겨난 건물을 헐고 바다를 사람들 가까이로 끌고 와야 합니다. 인천은 도크가 발달한 유일한 도시죠. 세계 갑부들이 한두 달 동안 여행하는 큰 선박들이 오래 머물게 해야죠. 인천공항도 있고, 또 인천에는 예쁜 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긴 팔미도 등대도 역사죠. 서울 사람들이 바다 보러 강원도 가는 대신 인천으로 오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볼거리를 만들어야죠. 외국 사람들은 신포시장에 데려가도 좋아할 겁니다. 한꺼번에 일을 추진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하나씩 사들여서 기다려야죠.” 리씨는 초등학교 때까지 부천에서 태어나 살았지만, 그 이후로는 쭉 인천에 살아 인천사람이 됐다고 했다. 그는 중구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은 구도시권을 살려야 사람들이 옵니다. 예전엔 송도에 새 많았거든요. 해안선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은 아무 죄 없이 우리가 개발한 데를 환원시키느라 애먹을 거에요. 지혜로운 우리 조상들이 건드리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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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씨는 중학교 때 기타를 처음 잡아봤는데 그냥 ‘만져본’ 거라고 했다. 대학은 국문과에 들어갔고, 당시 기타는 전공이 없었으니까 열심히 연습했다. 1971년 부평여중 재직시 이태리 연주자 이름을 붙인 ‘카르가시 고전기타합주단’을 창단했고, 1980년에 ‘리여석 실내합주단’을 만들면서 전문 연주 단체로 들어섰다. 1990년에 마침내 30명의 정규단원과 ‘리여석 기타 오케스트라’를 이름을 바꾸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냐는 질문에 그는 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주로 편곡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써요. 그 외엔 레슨 좀 하고 카페 일 하고, 한 달에 한 번 바리스타 자격 있는 사람들한테 무료로 커피 교육 시킵니다. 실전 현장에서 경험을 토대로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옵니다.” 파랑돌 카페는 1,2층 창가로 화분이 많아 화사했다. 2층은 탁자마다 히야신스가 짙은 향기를 뿜으며 잘 자라고 있었다. “산 식물들이 우리 인테리어에요. 비용 절감도 되고, 시각적으로도 좋아요. 꽃 보러 오는 분도 있어요. 우리 집 특징이 살아있는 꽃이 많다는 점과 깨끗한 화장실입니다.”

“1년에 한 번 정기연주회를 하고, 비정기연주회는 수시로 열립니다. 올해는 특히 10월이나 11월경에 일본 연주자들이 오는데, 아주 중요한 행사죠. 지난해에는 우리가 갔으니 올해는 그들이 와요. 우리 기타 오케스트라는 전국에 하나밖에 없어요. 시립교향악단에만 신경 쓰는 것 같아요. 우리한테는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공연장 정도 후원하면 되는데 시에서는 그게 안 되나 봐요. ‘기타 오케스트라’ 틀만 봐서는 특화할 수 있어요. ‘인천에 가면 볼 수 있다’고 사람들이 올 수 있거든요. 지원없이 40년 넘게 유지해온 순수민간단체는 우리가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뉴욕필이나 베를린필은 100년 이상 됐습니다. 그 단체들은 생계유지 시스템이 마련돼 있죠. 우리 오케스트라는 인천이 내세울 수 있는 단체입니다. ‘기타 오케스트라’는 우리나라에서는 낯설지만 외국에는 많아요. ‘오케스트라’라면 적어도 50명이 돼야 하지만 우리는 30명도 힘겹게 모인 겁니다. 편성이 오케스트라도 돼있어서 그 명칭을 그대로 씁니다. 소프라노 기타, 알토 기타, 프라임 기타, 베이스 기타, 콘드라바스 기타, 기타 로온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법상 차이는 있지만 실제 바이올린 오케스트라와 비슷합니다. 다양한 기타를 편성해서 연주하니까 명칭을 오케스트라라고 합니다.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합니다.”
“기타 자체가 합주가 아닌 독주를 위한 악기입니다. 피아노처럼 여러 음을 내는 화성악기죠. 그렇다면 기타를 색다르게 연주해 보자 한 겁니다. 유럽에는 기타 오케스트라가 100명 정도 됩니다. 우리도 세월이 지나면서 표준형 기타 하나만으로 표현에 한계를 느끼고, 합주형 기타를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레퍼토리가 없더군요. 그래서 모든 음악을 기타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야 합니다. 그동안 450곡 편곡했고, 200여 곡 정도 연주했어요. 일요일마다 30여명이 모여 연습합니다. 전공한 사람도 있고, 기타 선생님하는 사람도 있고, 직장 다니는 사람도 있죠.” 그는 이어 청바지 통기타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통기타 들고 가면 압수했어요. ‘불량청소년’의 상징이었거든요. 사람들이 모이는 걸 단속하다 보니 그리했어요. 사람들이 기타 하나로, 바닷가에 가서도 모이고 산에 가서도 모이고, 청바지 자르고 장발 자르고 기타 빼앗았죠. 다 ‘불량’으로 몰다 보니, 기타 이미지는 상당히 나빴어요. 1970년대 모임을 만들 때 엄청 욕먹었어요. 그래도 당시는 ‘낭만’이 있었고 순수했지요. 당시 유일하게 ‘낭만’을 느낄 수 있었던 건 기타 들고 노래 부르고, 소통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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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요즘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아이돌 그룹이 부르는 노래는 너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고 했다. 영어가사를 비롯해 알 수 없는 말 천지라고 하면서 금방 잊어버리는 가사들이 많다, 가사는 시와 마찬가지라고 힘주어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기타를 배우라고 하면 과정을 못 참아요. 시간이 가야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합니다. 어른들도 더 멋있는 반주가 나오는 노래방으로 가죠. 대중문화가 상업적으로 흘러갔습니다. 스트레스 해소방법이 한쪽으로 몰리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연주회 음악을 듣고 연극을 하고, 책을 읽으면서 인간성품을 자기정화를 해야죠. 시설이 좋아서 편리할지는 모르지만, 순수성이 묻히니까 살기 힘들죠. 마음이 없어지니까요.” 노래 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이야기가 잘 들어온다고 했더니 그는 자신이 국문과 출신이고, 예전에 시를 2회 추천까지 받았다고 슬몃 던졌다. 당시 3회까지 추천을 받으면 시인으로 등단하는 거였는데, 2회까지 받고 시를 놓았다고 했다. 어디론가 잡혀가 혼나고부터는 시를 쓰지 않았다.

요즘 우리 사회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나라에 대해 민족자긍심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끌어다 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나 중국처럼 합리화해서 가르쳐선 절대 안 되죠.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자신감을 줘야 합니다. 영어나 수학도 중요하지만 역사가 중요합니다.”
그는 또 작업실에 내려가 기타 종류를 설명해주었다. 배가 불룩한 기타는 가장 낮은음을 낸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많은 사람이 기타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러 인천을 찾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처럼, 인천항을 들어오는 배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는 멋진 ‘기타 오케스트라하우스’ 전용 음악당이 자유공원 자락에 버티고 있다면 모든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과연 바닷바람 맞고 비릿한 내음 물씬 풍기는 바닷가 기타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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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춘 2013-02-26 11:55:20
리여석 선생님과 파랑돌! 인천사람으로서 자신있게 자랑할 수 있는 아이콘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기사 작성할 때 오타, 문장 정리를 바르게 하시기 바랍니다.(바삐 쓰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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