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관계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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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관계를 생각하며
  • 최재성
  • 승인 2013.05.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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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최재성 / (주)생활나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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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한참 동안 우리 집에서는 가사 분담을 두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맞벌이이기에 적절한 가사 분담이 필요했는데, 말로는 동의하지만 의식과 실천이 따라주지 않는 필자가 문제였다. 바쁜 일 있다며 청소를 하지 않거나 설거지 거리를 쌓아 놓은 필자에게 아내는 “이걸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해야 하는지를 좀 생각해봐. 나도 당신처럼 바쁘고 피곤해.”라고 말하곤 했다. 이제와 고백하건데 이 말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청소와 설거지가 “내 일”이라고 받아들이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사실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도 갈 길은 멀다. 무엇이 문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몸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봉건적인 가부장제의 질서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즘 세간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갑을관계”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봉건적 의식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라면 상무’의 대한항공 여승무원 폭행사건과 ‘빵 회장’의 호텔 직원 폭행사건, 남양유업의 조폭적 영업 행태, 청와대 대변인의 미국 대사관 인턴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갑을 문화”를 개혁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지만, 조금 더 시야를 확대하여 이 참에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지 않는 우리 사회의 봉건의식을 개혁하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할 제조업체가 대리점에 재고를 밀어 넣어 이윤을 챙기고 손해를 전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상식이 아니다. 거래를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항공사 승무원이나 백화점 직원을 종 취급하는 사람, 엄연히 대사관에 인턴으로 채용되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여학생을 마음대로 술자리에 불러내고 희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근대적 시민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또 한편 라면 상무와 빵 회장을 비난하지만 백화점에서 마트에서 식당에서 콜센터 직원과의 통화에서 갑의 지위를 한껏 누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윤창중은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를 언급했다. 웃기는 사람 아니냐고, 그럼 한국에서는 공적으로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인턴 직원의 허리든 엉덩이든 툭툭 칠 수 있는 거냐고 욕하다가도 솔직히 우리나라에 그런 어두운 문화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의 하청을 받으면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업체가 또 다른 업체에게 하청을 주면서 부당한 대우를 강요하는 일도 널리 알려져 있고, 남양유업의 사례가 정도는 다를지언정 산업 전반에 퍼져 있다는 것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현대 사회의 야만성을 논하기에 앞서 근대적 사회의 기본부터 갖추어야 할 것 같다. 중세와 다른 근대의 가장 큰 특징은 신분제의 해체이다. 나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나보다 낮은 사람도 없는 사회,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근대 사회 아니던가? ‘나와 그것’의 도구적 만남이 아니라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했던 마르틴 부버의 생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문화를 위해 다 함께 노력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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