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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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
  • 양진채
  • 승인 2013.06.23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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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양진채/소설가
고령화가족.jpg
 
‘아, 나의 아버지.’ 며칠 전 주간지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청탁한 에세이 제목이었다. 아버지라니. 결혼을 하고 나는 내가 보아왔던 아버지의 모습을 내 아이들이 아버지에게서 보길 원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버지는 내게 멀고 부정적인 존재였다.
내 나이 갓 스무 살, 아버지는 혈압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늘 무언가 못마땅해 하는 얼굴.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히 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긍정적일 리가 없었다. 돌이켜보니 어찌된 일인지 내 첫 소설집에 묶인 단편소설에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 것 같다. ‘것 같다.’는 정말 그런지 꼼꼼히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이고, 사실 나도 내 소설 속에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부정적인 이미지 조차로도 내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내가 주간지 기자의 청탁에 응했다. 바로 얼마 전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단편소설을 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20매 가량의 짧은 소설 청탁이 들어왔고, 인천의 8부두 개방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문득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가 아니고 부두노동자였던 아버지가 가져오던 검은 설탕에 관한 기억이었다. 짧은 소설을 쓰고 나자 그 당시의 기억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고, 나는 다시 그 기억을 붙들어 단편소설을 완성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서 복원되었다. 물론 그 복원된 기억 속에도 아버지의 따스함이나 다정함은 없었다. 내 애틋한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냥 가족 구성원일 뿐이었다.
영화 ‘고령화 가족’을 보면 수시로 삼겹살을 구워먹는 장면이 나온다. 침이 고이고 허기가 느껴질 정도로 노릿노릿 잘 구워진 삼겹살과 상추, 닭백숙, 불고기, 피자, 마지막에 라면 먹는 장면까지 영화는 먹는 것으로 맥을 잇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감독은 밥상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나는 느꼈다. ‘늘 밥상에 둘러 앉아 함께 밥을 먹는다면 피가 섞이지 않은 남도 가족과 같다.’ 반대로 말하면 피는 섞였으나 같이 밥을 먹는 일이 드믄, 다만 한 공간에서 존재하는 구성원을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영화였다. 물론 감독과 상관없이 한 관객으로서 느낀 감상이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소설에 비슷하게 조차 등장하지 않았던 아버지 존재를 생각하자 새삼 가슴 한 편이 묵직하다. 아버지는 힘든 노동을 하며 어렵게 가족을 이끌어왔다. 아버지에게 가족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내와 자식들을 책임져야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 미간의 주름은 덜 깊었을까. 새삼 누군가 누구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 그 책임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졌을 때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실감한다.     
  다음번에 아버지에게 성묘 가서는 ‘아버지는 거기서도 빽없고 힘없으니 우릴 도와주지 못하죠?’ 따위의 불경스러운 언사는 뱉지 말아야겠다. 다만 아버지가 좋아하던 담배와 소주 한 잔 따라놓는 것으로, 이제는 더 이상의 어떤 책무도 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나도 나이를 먹나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불렀다는 내 이름. 며칠 째 집에 들어오지 않은 딸을 찾은 것일까, 아니면 딸 이름으로 불렀던 아내를 찾은 것일까. 이 저녁 문득 그것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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